잠잠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혜세(reciprocal tax)’로 다시 한 번 무역공세의 포문을 열자 우리 정책당국은 혼란에 빠졌다. 오는 3월 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3차 협상을 준비하던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이 양허관세를 골조로 하는 양자협정인 FTA를 무력화하겠다는 것으로 예기치 못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수세적이던 한미 FTA 개정협상이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3일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호혜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이번주에 내놓겠다는 발언이 전부다. 한미 FTA로 자기네들이 양허한 게 있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단은 미국이 호혜세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지에 따라 우리 산업의 피해 규모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이미 양허가 끝난 품목을 제외하고 관세가 남아 있는 품목에서만 호혜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 수출물량이 많지 않은 농산품이나 기계류 등의 분야로만 피해를 국한시킬 수 있다.
한미 FTA 발효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 제품에 대한 관세 철폐율이 96.7%, 미국은 95.2%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대미 수출의 21.2%에 달하는 자동차는 이미 양국 모두 관세가 ‘제로(0)’다. 무선통신기기나 자동차 부품 등의 주력 수출품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1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이 작성한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재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발효 5년이 지난 뒤 우리나라의 관세율이 높은 품목은 식물성 유지, 곡물, 음료·담배, 설탕, 기계 등에 불과하다.
문제는 미국이 적용 기준을 달리할 때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발효 후 5년이 지난 뒤 전 산업의 평균 관세율은 우리나라가 6.5%로 미국(2.0%)보다 4.5%포인트 높다. 이 경우 한미 FTA는 사실상 무력화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호혜세의 적용 기준을 제품 기반으로 할지, 교역 전체로 할지, 평균 관세로 할지 등에 따라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다”며 “각 시나리오별로 분석해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또 호혜세의 실현 여부를 떠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한미 FTA 개정에서도 더욱 수세에 몰리게 됐다. 개정협상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세이프가드 발동에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로 맞불을 놓는 등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다자통상체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한 만큼 우리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WTO 제소 카드도 힘을 잃게 됐기 때문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도상국은 다자주의 통상체제에서 강대국의 통상공세를 방어할 수 있는데 미국이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린 게 호혜세”라며 “안 그래도 유례없이 강성으로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협상팀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더욱 좁아져버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