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우리나라를 향해 통상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방한 이후 무기구매 등 쏠쏠한 선물을 자국으로 챙겨간 뒤 잠잠하던가 싶던 공세가 더욱 큰 강도로 재점화 된 것이란 평가가 나옵니다. 우리 통상 당국도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적극적인 ‘맞불’로 대응하고 있는데요. 최우방국인 양국의 강대강 맞대결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지난 14일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이 한국산 철강과 변압기 반덤핑조사에서 ‘불리한 가용정보(AFA)’를 적용해 고율의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한 조치가 WTO 협정에 어긋난다고 판단해 WTO 분쟁해결절차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AFA란 미 상무부가 조사대상 기업이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거나 충분한 협조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경우 제소자인 미국 기업이 제출한 불리한 정보를 사용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조사기법입니다. 미국은 2015년 관세법 개정으로 이 기법을 도입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 제품에만 8번 AFA를 적용했습니다. 세율만 9.49~60.81%에 달합니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과 8월 냉연강판의 경우 반덤핑으로 34.33%, 상계관세로 59.72%의 세율을 얻어맞았습니다.
첫 AFA 조항이 적용됐던 2016년 5월 이후 우리 철강업체는 미국의 이 같은 ‘관세 폭탄’이 부당하다며 적극적으로 정부에 WTO 제소를 요청해왔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그리고 북핵 문제 등이 맞물리면서 계속 미뤄져 왔던 건데요. 뒤늦게나마 정부가 WTO 제소 카드를 들고 나온 배경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가장 힘을 얻고 있는 해석은 ‘맞불’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 공세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지난달엔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했고, 최근 들어서는 한중일을 표적으로 ‘호혜세(reciprocal tax)’‘를 부과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해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공세가 거세지자 우리 통상당국도 수세적이었던 지난해와 달리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실제로 미국과의 통상 분쟁을 WTO로 가져간 게 올해 들어서만 벌써 두 번째입니다. 진행되고 있는 분쟁을 포함하면 미국과 WTO에서 5건의 케이스를 두고 맞붙고 있습니다. 세탁기 반덤핑·상계관세 소송과 관련해 WTO에 보복관세 7억1,100만달러를 신청했고 세탁기·태양광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도 WTO 제소를 위한 절차를 각각 밟고 있습니다. 유정용강관(OCTG) 반덤핑관세 소송과 관련해서는 패소한 미국의 이행절차가 진행되고 상황입니다. 최우방국인 미국과의 사상 유례없는 통상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맞불에 더 강한 맞불일까요. 트럼프 대통령도 발언 수위에 더욱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여야 상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미국 노동자를 위한 공적 무역을 주제로 연 간담회에서 “한국과의 협정은 재앙이었다. 우리에게 그 협정은 손실만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수입 세탁기 등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에 서명하면서 한미 FTA를 “재앙으로 판명된 거래”로 규정하는 등 한미FTA를 여러 번 ‘재앙’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일단 정부는 WTO 분쟁해결절차(DSU)에 따른 양자협의 요청 서한을 미국에 전달하고 WTO 사무국에도 이를 통보한다는 계획입니다. 양자협의가 결렬될 경우 우리 정부가 WTO에 분쟁 패널 설치를 요청하게 되고, 이후 본격적인 분쟁절차로 접어들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으로 미국의 통상공세에 대응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국제 통상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한꺼번에 소송이 서너 개씩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드문 것을 감안하면 미국과 통상 분쟁을 개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정부 방침이 WTO 등 다주주의 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강경한 방식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우리 조치에 미국이 다시 강으로 맞부딪혀올 경우 문제가 커질 소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의 WTO 제소가 실제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미국의 보호무역 공세의 수위를 낮추는 데는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WTO에서 승소해도 미국이 고칠 것 같진 않지만 한꺼번에 하는 것은 협상 지렛대 차원에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며 “다만 호혜세와 같이 기상천외한 수단으로 미국이 계속 어젠다를 선점해가는 데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양국의 이 같은 신경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선 미국은 조만간 무역확장법 232조에 의거한 철강 안보영향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미국이 우리 주력품목인 철강에 대한 수입규제가 더욱 촘촘해지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미국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무역촉진권한(TPA)가 3월말로 종료되는 것을 감안하면 11월 중간선거까지 트럼프가 통상 제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우려도 내놓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율보고서나 직권조사 등을 통해 우리나라를 더욱 옥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맞불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