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 구조조정을 복기하면 전략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료들이 한진그룹과 힘겨루기를 하다 한진해운을 공중분해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다시 해운업에 세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한진해운을 역사에서 지운 후 어떻게 됐습니까. 한국 산업에서 대마(大馬)는 더 불사(不死)가 됐고 노조도 양보하면 죽음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졌습니다.”
정부가 최근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위원회를 출범시키자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통령도 지적했듯이 실패한 구조조정이 바로 해운업”이라며 이같이 꼬집었다. 해양진흥공사는 최대 12조4,000억원(자본금 3조1,000억원의 4배)의 공적자금으로 해운업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다. 한진해운 파산은 지난 2016년 9월. 당시 채권단은 조양호 회장이 가져온 자구안(약 4,000억원)이 요구한 6,000억원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끝내 글로벌 7위 선사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대가는 혹독했다. 한진해운의 북미항로 점유율(7%)은 유럽과 중국·일본 선사 등이 점령해 지난해 운송수지는 53억달러로 통계작성 이래 사상 최대의 적자를 냈다. 국적화물 적취율은 30%대에서 10%대로 추락했고 약 3조원의 운임수입과 일자리 1만개(해양수산개발원 분석)가 사라졌다.
기업 자구안이 채권단 요구안에 2,000억원이 모자라 한진해운을 버린 셈이지만 그 결과 해운업에 들어간 공적자금은 무려 최대 12조원에 달한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진해운 구조조정은 화폐화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을 다 날린 패착”이라고 지적했다.
한진해운 트라우마는 정부와 관료를 180도 바꿔놓았다. 지난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2015년 4조2,000억원을 받고도 채무불이행 위기에 몰린 대우조선해양(042660)에 2조9,000억원의 공적자금 지원을 직접 호소한 일이 대표적이다. 결국 노조의 파업자제 확약서와 인력 구조조정 등 추가 자구안을 받은 뒤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대우조선해양 자금난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대량실업을 감수해야 했다.
문제는 정부가 한진해운 사태 이후 구조조정의 두려움을 알고 피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난해 중국 조선소와의 경쟁에서 밀려 생존이 불투명한 성동조선과 STX조선의 처리를 미뤄둔 상태다. 지난해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대(9.9%)를 기록한데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16.4%, 7,530원)의 여파로 실업급여 신청자 수는 사상 최대(15만2,000명)를 기록했다.
일자리 정부가 무색해진다는 비판이 일자 구조조정은 또 산소호흡기를 다는 쪽으로 가고 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조선업 구조조정은 산업과 금융의 관점을 균형적으로 살펴본 뒤 결정하겠다”며 회생 가능성을 내비쳤다. 성동조선의 경우 2012년 이후 다섯 차례의 경영정상화 계획을 거치며 약 2조원이 투입됐지만 회수율은 100%에서 45%로 추락했다. 살리려면 오는 2020년까지 미뤄둔 2조원의 채무를 재조정하거나 해결해야 하는데도 회생 기회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정부는 6월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동력으로 개헌을 추진하려 한다. 이 때문에 대량실업을 부르는 구조조정은 더 요원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러는 사이 외국 기업인 한국GM도 공장폐쇄를 거론해 우리 정부에 약 5,000억원과 세제혜택을 지원해달라며 압박에 가세했다. 성동조선(통영)과 STX조선(창원), 한국GM(인천·군산·창원·보령)이 무너지면 수도권과 경남·전북 등 광역지자체 선거가 불투명해지는 점을 공략한 것이다.
최악은 구조조정이 산업경쟁력 강화 없이 기업 생명만 연장하는 것이다. 이미 주력산업은 정규직 노조 중심의 고비용·저효율 구조 속에 힘을 잃고 있다.
파업자제 확약서를 썼던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공적자금으로 회사가 굴러가는데도 올해 임금 반납을 중단하고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조명탑 위에 올라가 결국 임금 일부를 올렸다. 한국GM 노조도 2012년 이후 2조5,000억원의 적자가 쌓였지만 5년간 357일간이나 파업하며 1인당 성과급 6,150만원과 기본급 46만원을 인상했다. 자동차 한 대 생산에 투입되는 시간이 일본(도요타)보다 11%, 미국(포드)보다 25%나 더 많이 소요되는데도 평균 임금(2016년 9,213만원)은 도요타(9,104만원), 폭스바겐(8,040만원)보다 높다. 정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56조원의 손실을 봤다. 하지만 좀비(한계)기업은 2010년 2,040개에서 지난해 3,126개로 30% 늘어난 것이 우리 산업현장의 현실이다. 김도훈 경희대 특임교수(전 산업연구원장)는 “산업기반과 인력붕괴를 막기 위해 구조조정 속도를 늦추려는 노력은 이해하지만 나쁜 모형은 안 된다”고 말했다. 조 교수도 “전 세계적으로 산업구조가 변하고 있는데 경쟁에서 밀린 중견 조선사를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며 “일자리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려야 산업이 산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