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 등 외교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전격 경질한 데 이어 이에 불만을 표출한 스티브 골드스타인 국무차관까지 해임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신임 국무장관 내정자는 의회 인준을 거쳐 일러야 다음달 말 취임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와 대북정책 대표 등 국무부 대북 라인의 공백이 더 길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자신과 노선을 달리하는 인사들을 모두 쳐낸 트럼프 대통령이 앞으로 일방적 외교 관계를 밀어붙이며 폭주할 가능성이 커져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 한미관계도 살얼음판을 걷는 불안한 형국에 빠져들고 있다.
AP통신은 1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틸러슨 장관의 경질을 발표한 후 골드스타인 국무부 공공외교 담당 차관의 해임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골드스타인 차관은 이날 오전 트위터로 국무장관 교체 사실이 알려지자 “틸러슨 장관은 잔류 의지가 확고했다”며 “그는 경질 이유도 모른다”고 불만 섞인 성명을 내며 백악관의 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외교 수장과 최고위 외교관이 동시에 물러나면서 트럼프 정부의 외교 공백 사태는 한층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틸러슨 장관이 이달 말 퇴임하면 존 설리번 부장관이 폼페이오 내정자의 인준안 통과 때까지 직무대행을 맡을 예정이지만 그를 도울 차관들은 이미 업무에서 손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골드스타인 차관의 퇴진에 앞서 국무부 서열 3위인 토머스 섀넌 정무차관도 지난달 개인적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고 후임자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미 외교협회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 출범 후 국무부 예산이 대폭 줄어 1년 만에 고위 외교관들의 60%가 국무부를 등졌다. 예산 부족 속에 구조조정을 맞자 베테랑 외교관들이 먼저 짐을 싼 것인데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및 대북 정책, 이민정책, 다자외교 등에서 파행적 주장들을 일삼자 외교관들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 것도 주된 이유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거지소굴(shithole)’ 발언으로 중남미 국가들을 비하해 존 필리 파나마 주재 미 대사가 사직서를 던진 바 있으며 조셉 윤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로베르타 제이컵슨 멕시코 주재 미 대사도 이달 초 국무부를 떠났다. 미 국무부에서 대북 정책의 핵심인 동아태 차관보와 주미 한국대사는 트럼프 정부 출범 후 1년 넘게 비어 있다. 국무부 고위직과 대사는 의회 인준이 필요한데 폼페이오 내정자의 임명이 우선이다 보니 다른 고위직 지명과 인준은 계속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 미 상원은 오는 23일 휴회에 들어가 다음달 9일 이후 폼페이오 인사청문회를 열 수 있는 상황으로 인준에 별 문제가 없을 경우 청문회를 마친 뒤 약 2주 후 표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 속에 외교라인이 붕괴된 상태지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견제나 조정역할을 제대로 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다. NSC를 이끄는 허버트 맥매스터 보좌관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 속에 이달 중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등 틸러슨 장관 해임과 맞물려 그 역시 입지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 등 미 언론은 북미 정상회담 등을 현실적으로 준비할 외교 전문가의 부재를 지적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강경 노선만 고집해 주요 안보 이슈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NYT는 틸러슨 장관 해임에 대해 “가장 무력한 국무장관 중 한 명이었지만 트럼프 정부에서 현실적 목소리를 내고 북핵 문제에 외교적 해법을 주장한 그의 퇴장은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틸러슨 해임 이후 ‘강경파’ 폼페이오 내정자가 주축이 돼 꾸려질 트럼프 정부의 2기 외교안보 라인에서의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의 색채가 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틸러슨 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등 외교정책에서 군사옵션보다 외교해법을 우선시해온 이른바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이 틸러슨의 이탈로 무너지고 폼페이오 내정자와 니키 헤일리 유엔 대사, 강경파로 변한 맥매스터 보좌관 등 ‘신 3인방’의 뒷받침하에 미 외교·안보 정책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색채가 더욱 짙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폼페이오 내정자와 매일 만나며 특급 호흡을 보인 점과 미북 정상회담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중앙정보국(CIA) 국장 출신의 국무부 수장이 강점을 가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폼페이오에 대해 “엄청난 에너지와 지성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았고 매우 비슷하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뉴욕=손철 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