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안 발의를 당초의 21일에서 오는 26일로 늦추도록 지시했다. 청와대는 국회가 6월 지방선거 때 동시 개헌 투표에 합의하면 개헌안을 발의하지 않거나 철회할 가능성도 열어뒀지만 자유한국당 등 야권은 청와대가 지방선거 승리만을 위해 ‘관제 개헌’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국회법 112조 4항은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할 경우 20일의 공고기간을 거친 뒤 국회가 60일 안에 기명투표 표결을 하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인 개헌 발의 찬성 측은 대통령이 이번에 인권과 민주주의 개헌안임을 강하게 입증해야 하며 개헌안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국가체제 혁신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대통령 발의가 현재 국회의원 의석 분포상 부결이 확실시되는 만큼 또 한 번의 개헌 기회를 날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대통령은 헌법 제128조 제1항에 따라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다. 개헌안 발의를 대통령이 하느냐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가 하느냐는 별문제가 아니다. 개헌안 발의의 맥락과 내용이 중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가 집권체제 장기화와 독재화로 귀결된 헌정사 경험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 개헌안임을 강하게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이 입증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시민이 이뤄낸 지난 1987년 민주화의 결실을 제대로 된 개헌으로 잇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유린한 헌법을 민주 헌법으로 회생시키지 못했다. 단적인 예를 들면 공무원의 노동3권을 침해한 5·16쿠데타의 잔재 또는 군인과 경찰의 국가배상청구권을 부정한 유신 헌법의 ‘헌법적 불법’을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는 헌법 제40조에 따라 입법권을 행사한다.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국민과 국가조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헌법이 추상적 문언으로 돼 있는 만큼 국회 입법권의 역할은 크다. 국회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막을 만한 충분한 입법권과 국정통제권이 있다. 여당이 되면 대통령을 추종하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이 문제였다. 그래서 지금 개헌의 핵심 대상은 제왕적 중앙집권제다. 지방자치의 헌법적 의미는 획일적 삶을 강요하는 중앙집권체제의 거부다. 사람들은 젠더 감성에 기초한 인권 최우선의 지방정부, 자립과 자조의 사회경제체제, 생태계 복원을 위한 지구적 관점의 지역사회, 이웃 지방정부와 협력하는 상호 부조사회 등을 꿈꾼다.
문재인 대통령은 약속어음제도 폐지를 주문했다. 헌법은 약속어음과 같다. 헌법을 폐지하거나 개헌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개헌안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국가체제 혁신을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적폐 청산’을 내걸었지만 국가정보원·군·검찰·경찰·행정부처 등 개혁 대상인 국가기관들은 셀프 조사·개혁에 따라 각자도생하도록 방관했다. 하나같이 일회적이고 일시적이며 공론화도 없었다. 혁신방안 실행을 점검할 수 있는 체계도 없이 개혁은 문을 닫았다. 크게 바뀐 것 없이 이삭줍기 정도다.
대통령 개헌안 발의의 필요충분조건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다수의 국가기관이 일사불란하게 권력 범죄를 저지른 국가체제와 정치·경제 권력의 유착구조를 청산하고 혁신하는 일이다. 정부조직법 등 국가기관 조직법 체계,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못하고 대기업 권력에 유리한 경제 관련 법률,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인권 침해적인 법, 지방자치법과 각종 교육법 등 개혁 대상 법률이 허다하다. 차별금지법, 조약체결절차법, 안전 관련 법, 인권기본법과 인권교육법, 블랙리스트 방지 관련 법 등 제정해야 할 법률도 부지기수다.
‘개헌 먼저’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국회는 물론 정부도 헌법 제52조에 따라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구체적인 실행계획 없이 큰 그림이 나올 수 없다. 개헌은 국민투표에 앞서 국회 재적 의원 3분의2라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개헌 약속의 부도를 막을 방법을 함께 제시해야 하는 이유다. 다양한 지역주민의 의사를 민주적 비례관계에 따라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법률 개정 차원에서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 당장 지방선거에서 거대 양당의 나눠 먹기가 발등의 불이다. 국회도 대통령도 지금 당장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지 않다. 제왕적 대통령은 물론 제왕적 국회의원·대법원장·대기업·지방단체장·사학권력 등 한국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폭력적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터 잡은 사회를 정립하는 일은 개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국민의 입법·소환 권력을 제도적으로 회복하는 일은 국민의 목소리에 따르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본래 주권자 국민의 것이라면 먼저 국민에게 복종하라. 개헌 논의 과정에서 국민에게 충분한 사실·진상·정책·법률 정보와 선택지를 내놓으라. 다수결이 아니라 소수의 인권을 보장하는 숙고의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라. 우리가 걸어온 길은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국민의 결정에 권력이 따르는 길이었다. 사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개헌 한 방으로 끝날 길이 아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거나 촛불의 뜻을 함께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결정권자다.
언제나 혁명은 아래에서 오고 아래에서 확인한다. 대통령은 그 뜻을 헤아려 법제 혁신 또한 행정규칙에서 대통령령·총리령·부령 그리고 법률 폐지·개정·제정을 거쳐 헌법에 이르러야 한다. 하위 법규범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벽에 부딪칠 때 주권자는 헌법의 문을 열어준다. 무조건 개헌을 앞세우는 것은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주권자의 몫을 넘보는 일이다. 국회와 대통령, 모든 권력에 해당하는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