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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선 블랙야크 회장 "욕심도 화도 다 받아주던 산..토종 아웃도어 일군 원동력 됐죠"

■ CEO&스토리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인터뷰/권욱기자



산에서 인생을 배운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산의 굴곡진 능선이 마치 인생의 등락과 같아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을 산을 타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겸허해진다. 어떤 험난한 삶 앞에서도 쉽게 지치지 않고 그다음 이어질 평탄한 길을 기대하며 묵묵히 등반한다. 45년 전 산과 사랑에 빠진 한 젊은이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등산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제조해 팔다가 국내 첫 토종 아웃도어 브랜드 회사까지 창립, 이제는 유럽의 산악인들까지 한국 아웃도어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바로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이다. 블랙야크는 어느새 창립 45주년을 맞았다. 강 회장을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블랙야크 본사에서 만났다.

학창시절 한라산 벗삼아 먹고 자며 비박..자연스레 산에 눈떠


국내 첫 등산가방 등 사업 도전했지만 잘된다 싶으면 ‘된서리’



그는 동진레저에서 시작해 블랙야크를 만들고 포틀랜드의 친환경 라이프웨어 브랜드 나우를 인수하는 긴 여정 동안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묻자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신조였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자연을 사랑하는 순수함과 삶에 대한 진정성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자연은 진솔합니다. 얼마 전 우리가 지원하고 있는 네팔 학교에서 아이들이 왔는데 자기소개를 하라고 마이크를 줬더니 한 번도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서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술술 자신에 대해 얘기를 하더군요. 도시에 나와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었어요. 자연과 더불어 산 이 아이들은 상대를 의식하지도 않고 창피한 것도 모르고 순수 그 자체였어요. 자연의 힘인 거죠.”

강 회장은 우리 인생의 굴곡진 순간마다 자연에 기댄다고 했다. 나우 인수를 주도했던 강준석 블랙야크 상무인 아들과 대화가 필요할 때도 무작정 산을 찾았다.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강 상무가 더욱 유순해지고 강 회장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산 덕분이었단다.

“초등학생 3학년 때 처음 아들을 산에 데려갔어요. 당시 떼를 많이 써서 할머니와 엄마가 아들을 막지 못했어요. 아들이 처음에는 산에 따라가기 싫다고 눈물이 코 범벅이 되도록 울었습니다. 30분 동안 울던 아이는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울음을 그쳤죠. 보통 처음 30분은 말을 안 하고 따라오기만 했어요. 그러다 숨이 차면 쉬고 물을 들이켜고 또다시 걸었고요. ‘힘들지?’라고 물었더니 ‘예’라고 답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강 회장의 대답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1~2시간을 걸으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죠. 그때부터 과일을 꺼내놓고 먹고 도시락이라도 까서 먹기 시작하면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술술 털어놓았지요.” 아버지와 아들은 산속 자연 안에서 진솔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됐다. 한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강 회장과 강 상무가 등산하던 중 폭우가 쏟아졌다. 아버지와 아들은 비를 쫄딱 맞은 채 언덕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그는 “산에서 자연의 성난 모습도 다 만나본 아들은 인생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터득한 것 같다”고 떠올렸다.

강 회장은 제주도 서귀포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한라산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중학교 때 한라산을 만나 지금껏 80여차례 올랐다. 가끔 방목하던 소와 말이 한라산으로 내빼버리면 이들을 찾으려고 산을 산산이 뒤지고는 했다. 소와 말을 찾다가 산딸기도 먹고 열매도 따 먹으며 산에서 잔 적도 많았다. 이미 중학교 때 강 회장은 그렇게 자연과 함께 잠드는 ‘비박’의 매력에 빠졌다.

“산은 그렇게 생활이고 삶의 일부이며 살아가는 과정이었어요. 그러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에 갇히게 되니 산이 그리워지고 몸살을 앓게 됐죠. 그러던 중 서울에는 북한산·도봉산·수락산·관악산·청계산 등 산이 많다고 들었어요. 소박하게도 다양한 산에 오르고 싶어서 다니던 은행을 관두고 상경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이모님 댁에 얹혀살았다. 처음에는 몇 군데 산만 올라보고 고향에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산이 그를 떠나 보내주지 않았다. 이모님은 당시 남대문에서 여학생 교복 코트 공장을 운영 중이셨는데 낮과 주중에는 이모님 일을 돕고 밤과 주말에 틈만 나면 산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산에 들고 다닐 배낭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군 배낭을 하나 구해 종로 노점 수선집에서 미싱일을 하던 아주머니에게 뜯어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만든 배낭을 들고 다니다가 불편하면 다시 뜯어 재봉을 맡기기를 네 차례나 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배낭을 손에 얻었다. 그게 국산 1호 토종 등산 가방이다.

산 이웃들로부터 ‘어디서 났느냐,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한 ‘덕후’가 이미 45년 전에 탄생했던 것이다. 강 회장이 만든 등산 가방에 대해 폭발적인 반응이 오자 그는 당시 월급이 6,000원이던 시대에 이모님에게 10만원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순진한 20대 중반의 청년은 10만원어치 가방을 모두 외상으로 날리며 첫 사업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다시 이모부의 비자금 40만원을 털어 재도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또다시 암초를 만났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방을 얻는 데 쓰려던 50만원을 고스란히 사기당한 것이다. 같은 고향 출신의 여성과 제주도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미 돈을 모두 날려버린 탓에 서울에서 함께 살 곳이 없던 시절을 어슴푸레 떠올렸다. “당시 주변이 사창가였던 창신동 여관을 전전하며 아내와 함께 살았는데 아내가 매일같이 울었어요. 한 지인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피로연을 열고 축의금으로 모인 50만원으로 신혼방을 겨우 얻었죠.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네요.”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인터뷰/권욱기자


히말라야 등반 계기로 블랙야크 론칭..아웃도어 트렌드 이끌어


“친환경 ‘나우’ 골프웨어 ‘힐크릭’ 발판 2020년 세계 1위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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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항상 제로섬 게임이다.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 곧 어딘가에서 플러스 성장이 이뤄진다. 그래서 젊어서 좀 힘들다고 좌절하거나 슬퍼할 것도 없다. 비바람과 싸우던 강 회장에게 어느 날 햇살이 내비쳤다. 지난 1977년 산악인 고(故) 고상돈씨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고 돌아와 대학에 산악부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배낭·침낭처럼 생기기만 하면 모두 팔려 나갔다. 강 회장은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어 국내 처음으로 내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를 썼다. 코펠이 군용만있었는데 일본에서 사온 것을 샘플로 얻어다가 똑같이 만들어서 팔았다”고 떠올렸다.

얼마나 장사가 잘됐는지 돈을 받아서 배낭에 구겨 넣고 집에 가서 꼬불꼬불 구겨진 돈을 밤새 아내와 다리미로 펴서 끈으로 묶고는 했다. “그때가 행복했어요. 욕심이 없었으니까.”

2년 뒤 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이었다. 계엄령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졌다. 사회는 얼어붙고 산에 가면 간첩으로 몰렸다. 모두 문을 닫았다. “힘들어서 열심히 산에 다녔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다시 통행금지를 해제하며 무박산행 열풍이 불었어요.” 또 한참을 신 나게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잘되는 듯하더니 산에서의 취사와 야영이 금지되면서 등산장비 업체가 또 된서리를 맞았다. 당시 동진레저 역시 매출이 땅에 떨어졌다.

이때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등반을 결심하게 된다. 1993년 엄홍길 대장과 함께 원정대를 꾸렸다. 엄 대장은 에베레스트 등정 5년 만에 초오유·시샤팡마 자이언트 두 봉을 성공해 16좌 레이스의 불씨를 살려냈다. 한편 강 회장은 등반 장비를 지고 가던 야크의 검은 털이 히말라야의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 1995년 국내 첫 토종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를 탄생시켰다.

그는 “히말라야의 척박하고 험한 자연 속에서 야크가 등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블랙야크의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었다”며 “한국에 와서 주력 아이템이던 등산 용품에서 의류로 선회하고 미국 고어텍스 등 고급 소재를 활용해 품질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블랙야크는 ‘산에도 패션 시대가 온다’는 문구를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당시 대부분이 원색이던 등산복 시장에서 블랙 컬러 열풍을 일으키며 브랜드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2000년 전까지는 경영에 힘 쏟기보다 그저 산이 좋아서 일에 매진했다. 2004년부터는 대리점을 모집하면서 블랙야크를 키워나가는 데 주력했다. 2000년대 후반 아웃도어 시장은 활황이었다. 그러나 2014년 7조원 매출을 정점으로 성장이 한계에 봉착하며 다시 블랙야크는 다른 브랜드와 함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어떤 때도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강 회장은 이미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로 무대를 옮겨 새로운 도전을 진행 중이다.

“2012년부터 아웃도어 본고장인 유럽 시장에 블랙야크를 알리는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블랙야크는 존재가 미미한 브랜드였지만 2015년부터는 세계 최대 규모 스포츠용품 박람회에서 최고 명품만 모여 있는 부스에 자리할 수 있었어요.”

강 회장은 어떤 꿈을 그리고 있을까. 그는 얼마 전 45주년 기념행사에서 “오는 2020년까지 세계 1위 브랜드로 우뚝 서겠다”는 야심을 재차 밝혔다. 그는 “그렇게 하면 돈을 못 번다. 정상을 추구하면 오히려 돈이 많이 들어가지. 전 세계 딜러·산악인들에게 블랙야크의 소재·기술력·디자인·필드테스트 부문 모두 인정받는 것이 목표”라며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필드테스트 전문가는 우리밖에 없다”고 자신했다.

3년 전 미국 포틀랜드의 작은 지속 가능 라이프웨어 브랜드 ‘나우’를 인수한 것 역시 강 회장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소재의 사용을 통해 환경적·경제적·사회적인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패션을 상품화와 대중화에 성공시켜 후세를 위해 기업이 가야 할 방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위해 강 회장은 이르면 내년 말 포틀랜드와 닮은 고향 제주에 나우한국사무소 겸 플래그십 멀티스토어를 만들 계획이다. 최근 선보인 정통 영국 골프웨어 ‘힐크릭’을 통해서는 한국 골퍼들이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유럽풍의 왕실 품격이 녹아든 골퍼복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강 회장은 “한 명의 고객이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블랙야크를 입고 평상시에는 나우를 즐기고 필드에서는 힐크릭을 착장하도록 하고 싶다”며 “이들 세 브랜드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아웃도어 시장에 르네상스는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장은 언제나 어려웠다. “언제 좋은 때가 있었나. 좋은 세상은 없습니다. 나우는 아예 시장도 없는 걸요. 허허. 시장도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사가 힘들면 강 회장은 히말라야로 간다. 산이 있어 블랙야크가 존재한다. 히말라야를 4~5일 올라가다 보면 숨이 콱 막힌다. 걸어서 올라가는 환경과 기업의 그것을 비교하면서 그는 모든 지구력을 다 쏟아낸다. “기업을 하다 보면 욕심, 화병이 생깁니다. 그걸 자연에서 식히는 거예요. 뇌가 외부 환경과 차단되고 편안해지면 모든 것이 잊혀지고 병치레도 욕심도 잊혀지더군요.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주고 싶어집니다. 마음의 치료를 하고 배움을 터득하고 기업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지혜를 얻어서 돌아오고는 합니다.”
/심희정기자 yvette@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인터뷰/권욱기자


●강태선 회장은
△1949년 △1968년 제주 오현고 졸업 △2007년 제주국제대 경영학과 학사 △2009년 동국대 경영전문대 석사 △1994~2009년 대학산악연맹 부회장 △2003~2009년 서울특별시체육회 감사 △1973년~ ㈜동진레저 ㈜블랙야크 회장 △1997년~ 베이징 블랙야크유한공사 대표이사 △2011년~ 제주대 겸임교수 △2013년~ 미국 나우아이앤씨 회장, 블랙야크강태선나눔재단 및 장학재단 이사장

이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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