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 봬도 미국이다.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결과를 보면 표면적으로 미국은 자동차 안전기준 쿼터 확대, 픽업트럭 관세 유예만 챙기고 한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한국이 철강 ‘관세 폭탄’을 영구적으로 잠재운 점, 농업 시장의 문을 굳게 닫은 점 등을 들어 ‘선방’했다고 자평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강팀과의 ‘빅게임’을 잘 마쳤지만 찜찜한 건 왜일까. “우리는 훌륭한 동맹과 훌륭한 합의를 할 것”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흡족한 반응이 자꾸 걸린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이래 봬도 상대는 손해 보는 게임은 하지 않는 미국이다. 미국이 숨긴, 또는 우리가 눈치 못 챈 손익계산서가 있다. 미국이 꼭 지키려 한 자동차 쿼터 확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현재 한미 FTA 규정에 따라 미국 자동차는 한국의 안전기준을 지키지 않더라도 업체당 2만5,000대까지 수출할 수 있다. 그래서 GM의 임팔라 차량은 빨간색 방향지시등을 켜고 한국의 도로를 달린다. 미국 업계가 한국 시장만을 위해 별도의 생산라인을 갖춰야 하는 부담이 커, 밀어붙였던 요구다. 이걸 5만대까지 늘리기로 합의했다.
황당한 건 미국은 포드·GM 등의 수출 물량이 현재 1만대도 안되는 데도 이 사안을 최우선에 뒀다는 점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를 근거로 손해가 미미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전문가들은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미래’를 봤고, 우리는 ‘현재’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급급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미래는 전기차에 있다. 수출 쿼터에는 전기차도 포함된다. 미국은 가솔린·디젤 차량은 유럽·일본산에 밀리지만 전기차는 선두다. 실제로 미국 업계는 전기차에 막대한 투자를 하며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려 하고 있다. 한국이 ‘관세 폭탄’을 피하는 데 한눈을 판 사이 미국은 미래의 전기차 시장을 위해 다른 것을 내줬다는 분석은 그래서 상당히 설득력 있다. 미국산 전기차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면 수출 쿼터 5만대도 부족할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미국의 쿼터 확대 요구와 관련해 한국GM이 철수하고, 그 물량을 미국에서 생산해 다시 한국으로 수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시중에 돈 적이 있다. 벌써 GM의 배리 엥글 사장은 “노사 자구안을 내지 못하면 부도가 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우려스러운 건 10년 뒤에나 날아 올 이번 협상의 청구서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그때까지 버텨줄지 걱정된다.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