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꽂이-적색 수배령] 잘나가던 러 투자 전문가는 어떻게 反푸틴 선봉에 섰나

■ 빌 브라우더 지음, 글항아리 펴냄

격변기 틈타 러 자본시장 개척

최대 외국인 투자자 된 브라우더

서방에 정부-재벌 유착관계 고발

푸틴 눈밖에 나 생명 위협 받으며

인권 투사 변신 과정 생생히 담겨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반푸틴집회’에서 발언하는 빌 브라우더 /사진제공=위키피디아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반푸틴집회’에서 발언하는 빌 브라우더 /사진제공=위키피디아



2009년 11월 러시아에서 정부의 탈세를 조사하다 당국에 체포돼 감금된 변호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스크바 교도소의 얼음장 같은 독방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한 끝에 숨진, 37세의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 정부의 탈세와 인권탄압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3년 뒤 미 의회는 마그니츠키의 이름을 붙인 법안을 통과시킨다. 2012년 12월 발효된 ‘마그니츠키 법안’은 러시아 인권침해 사범의 비자 발급 금지, 자산동결 등을 담고 있다.

마그니츠키의 죽음부터 그의 이름을 붙인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그 중심에는 한때 러시아 투자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던 빌 브라우더가 있다. 브라우더는 마그니츠키가 자문 변호사로 있던 허미티지 캐피털의 최고경영자. ‘푸틴과 검은 러시아에 맞선 미국 경제인의 실화’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 ‘적색 수배령(Red Notice)’은 소비에트 연합 해체 직후에도 검은 베일에 가려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러시아 시장을 개척, 러시아 최대의 외국인 투자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이후 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온갖 부정부패로 자산을 착복한 올리가르히(재벌)와 맞서다 ‘반(反) 푸틴주의자’가 되어 인터폴의 적색 수배령을 받게 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러시아 최대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에 투자, 100배의 수익을 올리게 된 지점(정확히 책의 중반부)까지 책은 그가 당시 불모지였던 러시아에서 승승장구하며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전복의 시대에는 위험과 기회가 상존한다. 첫 민선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개혁개방을 외치던 1990년대 초반의 러시아에선 전복의 시대를 틈타 22명의 올리가르히가 국부의 39%를 소유하게 됐다. 대규모 민영화 과정에서 1억5,000만 러시아 국민은 소외됐고 일찌감치 돈 냄새를 맡은 브라우더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브라우더가 처음으로 올리가르히와 맞선 것은 대형 석유회사 시단코가 브라우더만 제외하고 유상증자를 진행하기로 하면서다. 말하자면 한 명의 주주에게만 유증 참여 기회를 박탈해 주식을 희석화한 것이다.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올리가르히의 공공연한 불법행위를 막을 방법은 러시아 내에선 없었다. 결국 그는 파이낸셜타임스 등을 통해 여론전을 펼쳤고 시단코의 희석화 주식 발행을 전면 중단시켰다. 이후 그는 서구세계에 러시아 정부와 올리가르히의 유착관계를 낱낱이 고발하는 시대의 용자가 된다.

관련기사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올리가르히와 맞서 싸우는 브라우더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했다. 푸틴 역시 권력 장악을 위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던 올리가르히를 제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움이 연장전으로 넘어가면서 푸틴과 유착한 올리가르히를 정조준하게 되고 브라우더 역시 푸틴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책의 중반부터는 죽음의 위협 속에 사투를 벌이는 브라우더의 분투가 마치 정치 스릴러처럼 박진감 넘치게 서술된다.

정부와 소수 재벌 집단의 유착, 부정부패를 묵인하는 검은 장막을 걷어 내려 한 배경엔 사실 인권이나 인도주의적 마인드보다는 그의 펀드 수익률과 지켜야 할 고객이 있었다. 그러나 철저한 시장경제주의자로서 돈 벌 기회를 찾아다녔던 브라우더의 전투는 결국 그를 인권운동가·반(反) 푸틴 운동가로 만들어버렸다. 푸틴은 브라우더에 대해 2013년 인터폴을 통해 적색 수배령을 내렸고 러시아 법원은 마그니츠키 사후 진행된 재판에서 마그니츠키와 브라우더에게 거액의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했다.

그는 여전히 죽음의 위협 속에 전 세계를 돌며 범죄국가 러시아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그가 행방불명되거나 살해당하더라도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적어도 그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책이 한반도에 상륙한 이 시점, 한국 자본주의의 심장인 여의도는 개혁·개방의 목전에 선 북한을 바라본다. 18년만에 북한 최고 지도자의 방중 소식이 전해진 직후에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시장경제 전환을 선언하고 원산과 남포항 등을 개방할 것이라는 출처 불명의 정보지가 떠돌았다. 누군가는 정보 비대칭을 틈타 위험을 무릅쓰고 불모지에서 수익을 올린다. 불과 한 해 전까지 범죄국가로 받아들여졌던 북한의 변화는 ‘격변’이라는 단어조차 부족할 지경이다. 이 시점에 브라우더의 책이 북녘 땅의 너른 기회를 넘보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사유와 교훈은 각자의 몫이다. 1만9,500원


서은영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