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선대의 유훈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北,명확한 핵포기 담보않으면

美선 그어떤 방식도 거부할 것

'뒤늦은 후회' 없게 인식 바꿔야

임종건 언론인·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앞세워 남북·북미·북중 정상회담에 나서면서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遺訓)”이라는 말을 되풀이해 강조하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이루고자 한 것도 한반도 비핵화였다는 얘기다.


이 말은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거짓이다. 비핵화보다 핵무장화가 훨씬 큰 유훈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부자가 남한 및 국제사회와 몇 차례의 비핵화 협정을 맺기는 했다. 김일성 시절인 지난 1992년 1월 남북한이 체결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김정일 시절인 2005년 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이후 김일성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주장했다. 주한미군에 배치된 전술핵의 철거를 목표로 한 평화공세였다. 북한이 아직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을 때였다. 당시 김일성은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했다. 그는 핵 개발을 훨씬 노골화했다. 그가 표방한 강성(强盛)대국은 핵보유국을 뜻했다. 김정일 집권 시절 두 차례의 핵실험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개발했다.

2011년 김정일 사후 권력을 3대 세습한 김정은은 핵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여섯 번의 핵실험 중 네 번을 강행했고 그중 한 번은 수소폭탄 실험이었다. ICBM의 성능도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강화됐다.


평화공세의 시작을 알린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은 “우리는 나라의 자주권을 믿음직하게 지켜낼 수 있는 최강의 국가 방위력을 마련하기 위해 한평생을 다 바치신 장군님(김정일)과 위대한 수령님(김일성)의 염원을 풀어드렸으며 전체 인민이 장구한 세월 허리띠를 조이며 바라던 평화 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틀어쥐었다”고 핵무기 보유에 대한 자부심을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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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핵무기를 그가 과연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포기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포기할 것인가. 지금까지 나온 협상 조건들 가운데 가장 명확한 것은 ‘미국의 선포기, 후보상’ 조건이다. 포기를 조건으로 보상을 받고 나중에 약속을 깨는 9·19공동성명 식의 협상은 더 이상 없다는 얘기다.

북한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단계적 비핵화와 동시적 보상’ 방식을 내비치고 있다. ‘첫 단계’에서 명확한 포기가 담보되지 않으면 미국에 의해 거부될 공산이 크다.

북미 사이를 조정해야 할 우리의 입장이 ‘일괄 타결, 단계적 이행’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핵 포기 원칙을 일괄 타결 방식으로 확정한 뒤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보상도 하는 방식이다. 중국이 핵 포기와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쌍궤병진(雙軌倂進) 방식을 내놓았지만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와 같은 말이다. 선포기든 단계적 포기든 일괄 포기든 성공의 조건은 명확한 핵 포기를 담보하고 신속히 이행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파격적 결정이 빛을 내려면 핵에 대한 그의 인식이 파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핵무기는 가져봤자 쓸 수 없는 무기이고 그것에 집착하는 한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릴 길이 없으며 남북이 화해하고 북미가 수교한다면 쓸 일도 없게 된다는 인식이다.

핵무기를 만든다고 그동안 치른 고초를 생각하면 버리기가 너무 아까울 것이다. 주민들에게 변명할 말도 구차할 것이다. 그래서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도 밖에서나 할 뿐 북한 주민들에게는 함구하고 있다.

김정은은 4월1일 우리 방북예술단의 공연을 참관한 뒤 ‘뒤늦은 후회’를 부른 가수 최진희에게 감사를 전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애창곡으로 북측의 요청에 따라 선곡된 노래라고 한다. 그의 뒤늦은 후회가 회담 성공을 위한 깨달음이 되면 좋겠다.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도 잘못은 있으니까요.’ 그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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