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가 넘실대는 가파도는 제주도 남서쪽 서귀포 모슬포와 최남단 섬 마라도 사이에 자리 잡은 가오리 모양의 섬이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뱃길로 15분이면 닿는 가까운 곳이지만 검은 현무암의 제주도 다른 지역과 달리 회색 조면암으로 이뤄져 돌담부터 들판까지 전혀 다른 풍광을 그려낸다. 사람 사는 집보다 청보리밭이 더 넓어 거주민은 170명뿐이나 매년 4월 청보리축제 때면 6만여명이 다녀간다. 그러나 정작 가파도 주민들은 “관광객은 화장실만 쓰고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곳”이라며 불만을 터뜨려왔다. 그러나 우도와 마라도 등이 난개발로 본래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전례가 있는 제주특별자치도는 난감했다. 그래서 현대카드와 손잡았다. 이른바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섬 만들기를 표방하는 ‘가파도 프로젝트’다.
지난 2012년 착수해 6년 만에 실현된 가파도 프로젝트가 12일 처음 외부에 공개됐다. 가파도에 첫발을 디디면 만나는 ‘터미널’은 섬의 첫인상이자 마지막 잔상이다. 현대카드는 이 터미널을 조면암 색에 가까운 회색 조의 야트막한 단층으로 평지인 섬 경관을 가리지 않게 디자인했다. 가파도는 섬의 가장 높은 곳도 20m를 넘지 않는 평평한 접시 모양의 섬이다. 안에서는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 농민들이 수확한 청보리를 재료로 한 특산물을 판매 중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갈 수 있는 ‘스낵바’는 여행객을 위한 휴식공간이지만 뒤쪽으로 아카이브룸이 마련돼 섬의 역사와 특징을 한눈에 보여준다. 사람들이 떠난 후 수년씩 방치돼 철거 말고는 대책이 없을 것 같던 빈집은 리모델링을 통해 바다·청보리밭·돌담 등의 풍경을 간직한 숙박시설 ‘가파도하우스’로 변모했다. 이미영 현대카드 브랜드본부장은 “‘예술의 섬’이라 불리는 일본 나오시마는 민간 개발이었지만 가파도 프로젝트는 현대카드가 제주특별자치도와 함께 가파도 주민들이 모두 참여했다”면서 “나오시마와 달리 가파도는 예술이 함께하되 버려진 것을 활용한 새로운 가치 발견과 재생에 주목했고 조성된 모든 시설을 운영해 수익을 얻어가는 수혜자는 마을 주민들이며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는 게 차별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단순 개발이나 정비사업과는 달랐다. 섬의 남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예술인들의 작업공간 ‘가파도 에어(AiR·Artist in Residence)’가 이번 예술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1997년 외환위기로 리조트 조성 계획이 무산돼 20년째 방치된 지하구조물을 그대로 활용했다. 전체면적 약 1,542㎡에 개인 스튜디오와 공용 공간, 갤러리, 전망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양아치·정소영 등이 1기 입주작가로 선정돼 현재 이곳에서 작업 중이며 미술가뿐 아니라 문학작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초청될 예정이다. 이곳을 통해 가파도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이 국내외에 선보일 경우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한 홍보 효과를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외에도 옛 농협 창고를 개조한 ‘마을강당’은 동네의 구심점으로, 가파도 경제의 근간이 되는 어업센터와 새로 조성된 레스토랑은 해녀의 삶을 반영하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술이 섬을 되살린 일본 나오시마처럼 가파도도 새로운 변화의 시작에 섰다. 이날 마을강당에서 열린 공식 개막행사에 참석한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6년 전 너무나 아름다운 섬이 있다며 이끈 와이프(정명이 현대카드 브랜드 부문장)를 따라 처음 왔던 가파도”라며 “수많은 아름다운 곳들이 관광지로 난개발되고 버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실정에서 자연 보존과 지역 개발의 과제를 어떻게 모두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지금의 이 기적을 이뤘다”고 말했다. 현대카드는 가파도 프로젝트를 위해 1,500번의 회의, 2,000번의 제주 항공편을 이용했다. 예술가 레지던스인 ‘가파도 에어’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영국 테이트미술관의 자문을 구했으며 향후 오는 2020년까지 운영지원을 약속했다.
/서귀포=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