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韓철강 관세 면제해준 날, 트럼프는 웃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우리는 훌륭한 동맹과 훌륭한 합의를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달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을 지켜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입니다. 협상에서 픽업트럭 관세 철폐기간을 연장한 데다 신약 가격을 높일 방안까지 받아냈으니 꽤 만족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냥 퍼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미 FTA 협상과 맞물려 진행된 무역확장법 232조에서 한국은 예외국가로 지정됐습니다. 모든 수입산 철강재에 25% 관세를 부과하는 이 안을 업계는 저승사자라고 불렀습니다. 232조에서 면제 국가로 지정되기 위해 각국이 로비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한국만 빠져나오지 못하면 자칫 독박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죠.

헌데 트럼프 대통령은 크게 개의치 않은 듯합니다. 대신 쿼터제를 통해 한국산 철강 수출을 최근 3년 평균의 70%로 좁혀뒀기 때문이죠. 특히 현지 수요를 타고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던 강관(파이프)류 제품을 지난해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든 한국 철강을 미국 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반덤핑 관세를 매겨둔 개별 철강재에 대해 매년 재조사를 진행하고 관세율을 재산정합니다. 이미 한국산 철강의 80% 이상의 품목에 반덤핑 관세가 매겨져 있습니다. 미국은 매년 진행하는 개별 철강재에 대한 재조사에서 반덤핑 관세율을 높이면 언제든 한국 철강을 막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철강업계가 협상이 끝난 뒤에도 불안해했던 건 이 때문입니다. 미국이 한국 철강을 향한 융단 폭격은 일단 멈췄지만, 뒤돌아서 개별 철강재를 겨냥해 저격에 나설지 모른다는 거죠.

트럼프 대통령은 영점이 기가 막히게 잘 잡힌 저격용 총까지 들고 있습니다. 불리한 가용정보(AFA)라는 건데요. AFA는 자료제출이 미비하다고 판단하면 상무부가 자의적으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한 조항입니다. 주목할 점은 자료제출의 적합성을 상무부가 판단한다는 겁니다. 이 점을 이용해 상무부는 시답잖은 문제로 꼬투리를 잡아 자료 제출 불성실로 결론을 짓고, 자체적으로 고율의 덤핑률을 산정해왔습니다. 철강업계 관계자 말을 들어보면 수만 페이지에 이르는 자료를 일주일 안에 제출하라고 한 뒤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곧바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에 들어가는 식이라고 하더군요. 상무부가 일단 목표물을 잡고 AFA를 꺼내 들면 무조건 치명상을 입는 식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업계 우려는 현실화하는 분위깁니다. 미국은 13일 넥스틸 등 한국산 유정용 강관 제조업체에 보복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AFA를 어김없이 꺼내 들었습니다. 상무부는 넥스틸이 제출한 자료가 특히 미비했다며 이를 책상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자신들이 덤핑률을 추정한 뒤 75%의 관세 폭탄을 내던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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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틸은 이번 조치로 무역확장법 232조 면제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면제 조건으로 받은 쿼터를 채우기도 쉽지 않아 보이네요. 한국산 강관은 현지 가격보다 15% 정도 저렴하지만 이를 훨씬 웃도는 관세가 붙은 만큼 수출에 차질이 불가피할 걸로 보입니다.

이번이 끝이길 바라지만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러스트 벨트(쇠락한 제조업 도시) 사랑이 여전하기 때문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미국의 제조업을 살리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 철강업은 그중에서도 핵심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 철강업체를 살리려면 결국 중국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미 수백%대 반덤핑 관세로 중국의 대미 직접 수출은 막아뒀지만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는 중국산 물량은 여전히 골칫거립니다. 중국산 저가 소재가 세계 곳곳에 들어가면 글로벌 철강재 가격 낮아질 수밖에 없고 결국 미국산 철강재 가격을 낮추는 압력으로 돌아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산 철강재를 가져다 쓰는 국가를 향해 무역공세를 높이는 식으로 중국을 간접 압박할 수밖에 없죠. 미국이 모든 수입산 철강재에 25% 추가 관세를 매기는 조치를 두고 각국에 중국산을 줄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적잖습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중국산 철강재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입니다. 상무부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16년에만 1,422만톤을 수입했습니다. 뒤를 잇는 베트남(1,164만톤), 필리핀(651만톤)과의 차이도 상당합니다. 한국이 여전히 미국의 공세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유입니다.

업계의 시름을 깊게 하는 건 달리 대응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 매년 나오는 미국의 덤핑 판결을 미국 내 행정법원 격인 국제무역법원(CIT)에 제소하는 게 최선입니다. CIT는 비교적 균형 잡힌 판결을 내놓기 때문에 제소 효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 CIT 판결이 나오면 상무부는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이듬해 판결을 통해 다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면 그만입니다.

정부로서도 난감할 듯합니다. 미국은 우리의 핵심 동맹국입니다.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선 미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철강 문제로 각을 세우다가 다른 품목에서 역풍을 맞을 우려도 적잖습니다. 정부가 철강업계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 탓에 협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김우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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