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찾은 빅토리아 여왕이 몸무게가 아주 작은 포메라니안을 발견해 영국으로 데려왔다. 마르코라는 암갈색 포메라니안에 매료된 빅토리아 여왕은 64년간의 재임 기간에 15종의 견종을 양육하고 교배시켰다. 애견인이었던 그는 죽는 순간에도 가장 아끼던 포메라니안 튜리를 데려오라고 지시했고 “침대가 이렇게 크니 몇 마리 더 데려와도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애완견이 여왕의 임종을 지키게 된 셈이다.
오늘날 다양한 애완견이 등장한 배경에는 유럽 왕실, 특히 여왕들의 역할이 컸다. 여왕들은 더 작은 애완견을 키우는 데 열성을 쏟았고 연회나 만찬에 참석할 때 소매에 넣고 다닐 정도로 아꼈다. 작은 스패니얼은 유럽 전역에서 궁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반려견이었고 파피용은 16세기 렘브란트의 그림에도 여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파피용은 삼각형의 귀가 곧게 솟아 나비를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항상 가슴에 안고 다니던 견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애견 킹 찰스 스패니얼은 여왕이 처형되는 순간에 그의 옷자락을 물고 끌어내리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194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8세 생일을 맞아 웰시코기 수전을 선물 받았다. 그는 필립 공과의 신혼여행에 수전을 몰래 데리고 가거나 접시까지 직접 닦을 정도로 끔찍하게 아꼈다. 30여 마리에 달하는 로열 코기의 시조가 된 개다. 왕실에서는 코기가 사고를 쳤다고 해서 삿대질을 하거나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오히려 여왕으로부터 혼쭐을 당할 판이다.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아들인 해리 왕자는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여왕의 애완견이 자신과 달리 약혼녀 메건 마클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는 일화를 소개해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왕실 코기 혈통의 마지막 후손이었던 윌로우가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버킹엄궁 정원 한쪽에 자리 잡은 묘지에 묻힌다는데 외신에서는 왕실 관계자를 인용해 “여왕이 윌로우의 죽음으로 매우 힘들어 한다”고 전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마침내 찰스 왕세자를 후계자로 공식 인정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영국 왕실에 앞으로 어떤 변화가 휘몰아칠지 주목된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