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면서 판문점은 화해의 상징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분단과 대결이라는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실제 무력 충돌로 이어지면서 사상자를 낸 적도 있었다.
판문점의 역사는 휴전 협상이 시작 된 195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휴전을 위한 회담은 개성 북쪽 고려동에서 열렸으나 주변에서 북한군의 무력 시위가 잇따르자 국제연합군이 회담 장소를 옮길 것을 북측에 제의했다. 이 과정에서 북측이 새로 물색해 제안한 장소가 널문리 주막마을이다. 당시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에 해당한다. 서울에서 직선거리 52km, 평양에서 147km, 개성공단 8km 떨어진 지점이다. 북측의 제안을 국제연합군이 받아들이면서 같은 해 10월 22일 널문리 주막마을에 협상을 위한 천막이 등장했다. 판문점이란 명칭은 중국 측이 널문리 주막 마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났다. 판문점은 남쪽 땅도, 북쪽 땅도 아닌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불린다. 북쪽은 북한이, 남쪽은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고 있다.
판문점은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지만 남북은 물론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 체제 대결의 상징이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은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북미 전쟁 발발의 위기감이 커졌지만 28차례에 걸친 비밀 협상 끝에 북한은 11개월 만에 미국인 승무원 82명을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냈다. 1976년에는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8·18도끼 만행 사건이다. JSA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인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들이 도끼로 내리쳐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당시 일본에서 휴가 중이던 주한 미군 사령관이 전투기를 타고 돌아왔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판문점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졌다. 판문점에서 평화와 화해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던 적도 있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민간인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향했다. 정 명예회장은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실어 북으로 가져갔다. 남북 교류의 시작점이었다. 그리고 지난 27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최고 지도자가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함께 오고 갔다. 불과 5㎝ 높이에 불과한 군사분계선이었지만 손을 잡고 함께 그 턱을 넘는데 65년이 걸렸다. 이에 더해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의 당사자인 미국의 대통령이 판문점을 찾아 평화를 선언한다면 판문점의 상징성은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에 남을 수준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