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 통화가 ‘악몽’에서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 펀더멘털에 경고등이 켜진데다 고질적인 악재로 작용해온 정치 리스크가 선거일정을 앞두고 한층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의 긴축 행보가 빨라지며 자본이탈에 대한 불안감이 갈수록 확산되면서 시장 불안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신흥국 가운데 정치 리스크에 가장 크게 노출된 국가는 브라질이다. 오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 선두를 달리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이 지난달 투옥되면서 좌파 포퓰리스트 집권에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었지만 차기 대권의 향방이 불투명해졌다. 여기에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정부가 추진해온 연금개혁은 관련 국민투표가 대선 이후로 미뤄지면서 좌초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신흥국 시장에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고 표현한 4월의 통화 급락세는 이달 들어 오히려 더욱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2일(현지시간) 미 달러화 대비 헤알화 가치는 2016년 6월2일 이후 가장 낮은 3.549헤알에 마감됐다.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12.17% 하락한 것이다.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면서 주가도 동반 추락하고 있다. 이날 상파울루증시의 보베스파 지수는 2거래일 연속 하락한 8만4,547로 거래를 마쳤다.
여기에 경제가 파탄 난 이웃 베네수엘라도 브라질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베네수엘라가 브라질에 갚아야 할 2억7,500만달러 규모의 채무 상환일이 오는 8일로 예정된 가운데 현재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은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해외순방도 취소한 채 금융시장에 미칠 막대한 충격을 감독하고 나섰다. 디폴트가 현실화할 경우 헤알화의 추가 하락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음달 조기 대선·총선을 치르는 터키의 리라화 폭락 역시 배경에는 정치 문제가 있다. 경기과열에 따른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신용등급 강등 여파로 역대 최저치를 시험하는 리라화 가치는 이날 달러당 4.177리라로 떨어져 4월11일에 기록했던 역대 최저치 수준인 4.192리라에 근접했다. 문제는 금리 인상으로 경기과열을 진정시켜야 할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다시 통화 확장 정책을 펴며 리라화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FT는 “터키 정부가 최근 선거를 앞두고 경기진작을 위해 60억달러 규모의 채무 및 구조개혁 계획을 꺼내들었다”며 “리라화에 다시 한번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다”고 전했다. 라보뱅크의 한 전문가는 “터키가 6월 조기 선거를 발표한 후 리라화는 여당 집권에 대한 확신 속에 다소 안정됐지만 정부가 추가 지출계획을 밝히면서 채권 매도 압력이 커지고 리라 약세에도 불이 붙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1일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거시경제 불안뿐 아니라 높은 물가가 문제”라며 터키의 신용등급을 종전 ‘BB’에서 ‘BB-’로 한 단계 내린 것도 리라화 가치 급락을 부추겼다.
대외여건에 민감한 아르헨티나의 경우 미 달러화 가치 상승과 기준금리 인상 움직임으로 지난 1년 새 38%나 가치가 추락하자 지난달 27일 기준금리를 3.0%포인트 인상했으나 이달 2일 신흥국 통화의 전반적인 약세 속에 또다시 3.15% 하락했다.
인상했으나 이달 2일 신흥국 통화의 전반적인 약세 속에 또다시 3.15% 하락했다.
국제금융연구소(IIIF)는 “높은 부채를 떠안고 있는 신흥국에는 글로벌 금리 상승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금리 인상 기조는 신흥국 투자를 고려하는 투자자들에게 주요한 체크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