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만겁의 시간 속 찰나같은 이 삶..갈등 대신 여유로 채우세요"

■ 이사람-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

금강 미황사 주지 스님. /사진제공=미황사



봄기운 가득한 아침 절 마당에 발을 들이자 진돗개의 킁킁대는 소리만이 산사의 고요함을 흔든다. 무엇이라도 찾으려는지 두리번대는 흰둥개는 기자를 마주하자 반갑다는 양 꼬리를 세우고 컹컹 짖으며 달려왔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법당 문을 벌컥 열고 “달프야”라고 외치는 이는 바로 전남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52·사진). 달프는 냉큼 발길을 돌려 스님 품에 안겼고 스님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 번졌다. “얘도 나처럼 사람 좋아하는 것은 똑같아요. 이른 아침부터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두 팔을 넓게 벌려 서울 손님을 맞이하는 스님의 밝디밝은 미소에 땅끝마을까지 자동차를 몰고 달려온 기자의 여독도 봄눈 녹듯 말끔히 가셨다.

혜능선사 ‘육조단경’에 감명받아 출가


외환위기 후 실직자 치유하며 깨달음



부처님오신날(22일)을 앞둔 스님의 한 마디가 우선 궁금해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는 평등·평화·행복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평화의 기운이 샘솟고 있는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남북 갈등뿐 아니라 사부대중 모든 이의 마음에도 대립적인 갈등을 내려놓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스님은 최근의 남북 평화협력 분위기가 더욱 반갑다고 했다. 깊게 팬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양 끝을 잡아 벌리던 상황에서 벗어나 공존·교류의 장이 펼쳐진 이 상황이 다행스럽다고. 결코 쉽지만은 않은 길을 천천히 한 발짝 내딛는 모습이 마치 참선의 현장과 비슷하다 느껴졌다.

“양 극단으로 치닫기보다는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그런 쪽으로 사회가 나아가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사회가,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양 극단으로 치달으며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기보다는 가끔은 아무런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여유로운 세상 말이에요.”

스님은 최근 봇물처럼 터진 ‘미투 운동’에 대해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생겨난 일 같다”고 말했다. 21세기 물질만능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일상화된 수직적인 권력관계가 빚어낸 상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사회가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고 스님은 덧붙였다. “그동안 인격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위에 따라, 재력에 따라, 남녀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는 경우도 잦았고요.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상처를 드러냄으로 치유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사회,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가 만들어져야지요. 점점 더 좋아질 거예요.”

금강 스님/사진제공=미황사


지금은 부처님의 자비를 대중에 설파하고 사회의 평등과 나라의 평화를 위해 촌각까지 아끼며 살아가는 큰스님이 됐지만 금강 역시 젊어 한때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열 일곱살 때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도시의 학교로 떠나고 홀로 시골에 남게 돼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는 불량학생이 됐다. 이 방황은 6개월간 이어졌지만 당시 고교 스승이 우연히 건네준 혜능 선사의 ‘육조단경’이 스님의 삶을 바꿔놓았다. ‘백천만겁난조우(만겁의 시간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라는 글귀를 보고 감명을 받아 출가, 승려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지난 1982년 해남 대흥사로 출가한 스님은 1985~1987년 광주 원각사 청소년 지도법사,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집행위원,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 등으로 나름 역동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이 생긴 것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이었다. 은사이신 서웅 큰스님이 금강 스님에게 크게 호통을 친 것이 계기가 됐다. 전날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행자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만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보라’는 숙제에 답을 하지 못한 것이 호통의 이유였다. 평소 언짢은 소리나 큰소리 한번 낸 적 없던 큰스님의 꾸지람이라 마음이 더욱 무거웠던 터라 금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스님은 실직자들이 산중에 머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재기의 의지를 다지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실직자 단기출가 수련회’를 구상했다. 배신감과 원망의 굴레 속에서 자살까지 떠올렸던 이들을 치유하며 스님은 평생 이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누구나 머물다 갈 수 있는 미황사의 시작인 셈이다.

남북 평화협력 과정, 참선 현장과 비슷


양 극단 치닫기보다 공존·유연함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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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금강 스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치유’라는 화두가 굳게 자리 잡았다.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를 되살리는 것부터 금강 스님의 치유 손길이 시작됐다. 한때 미황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절이었다. 100년 전만 해도 암자만 12개에 달하고 중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진 큰 절이었지만 배가 침몰해 스님 40여명이 숨지는 사고를 겪은 뒤 몰락했다. 전각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스님 한 명만이 절을 지키는 폐찰이 되다시피 했다. 이런 사찰을 매년 10만명이 찾아오는 사랑방으로 만든 이가 바로 금강 스님이다. 많은 이들이 스님을 찾아 편하게 차 한잔 나눈다. 이야기 주제도 다양하다. 자녀의 진학 고민부터 삶의 본질까지 우리네 인생을 넘나든다. 스님은 평소 “절의 주인은 스님이 아니라 절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금강 스님은 템플스테이 문화를 처음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해남까지 누가 가느냐’는 조계종의 반대를 “오히려 외국인에게는 먼 거리가 아닌데다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삶과 생각을 가다듬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반박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스님의 예상은 적중했다. 해마다 외국인 500여명, 내국인 4,000여명이 템플스테이를 위해 땅끝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달마산에서 수행 중인 금강 스님./사진제공=미황사달마산에서 수행 중인 금강 스님./사진제공=미황사


미황사 주변 길이 18㎞의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를 조성한 것 또한 금강의 치유 행보였다. 스님은 “이 길이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 하나 없이 호미와 삽으로 완성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 말처럼 길 중간, 나무에 매달린 호미가 눈에 띄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손으로 50리에 달하는 긴 길을 만들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사람의 손에서 모든 문화가 만들어졌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의 손으로 많은 문화가 파괴됐습니다. 이곳 달마산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입니다. 완도와 진도,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제주도도 보이고 아름다운 기암괴석들도 빼놓을 수 없는 풍광이지요. 그런데 이런 산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를 위해 다리도 놓고 바위에 구멍도 뚫고 쇠사슬도 박는 것이지요. 산에 사는 사람으로 산을 해치면서까지 정복하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사는 마음이 드는 조그마한 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게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했고요.”

스님은 이 길만큼은 라디오나 스마트폰과 같은 물질문명의 이기를 배제하고 느리고 여유롭게 혼자 거닐기를 바랐다. 천천히 갈수록 마음이 휴식을 얻고 또 이를 통해 기운이 샘솟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저 빠르게 목표점을 향해 걷는 것은 운동에 불과하죠. 달리는 경주마처럼 앞만을 향하다가 힘들어 쓰러지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고요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스님은 느림의 미학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사실 이 길은 스님들이 대흥사·백련사를 오가던 수행의 길이었습니다. 미황사 내 열두 암자를 다니던 길이기도 했고 더 이전에는 인도 땅끝까지 온 부처님을 미황사까지 이고 온 길이기도 하지요. 중국 차마고도, 칠레 산티아고보다 더 오래된 수행의 길에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치유를 얻고 가길 바랄 뿐입니다.”

템플스테이·둘레길로 느림 미학 전파

“바삐 달렸던 인생길, 잠시 뒤돌아보길”



하지만 스님은 아쉬움이 크다. 산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서다. 그는 “담배꽁초는 예사요, 먹다 버린 맥주캔·막걸리병을 보면 가슴이 아리다”며 가슴을 쳤다. 심지어 사찰의 주차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까지 있다고.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이들이 울력해 사찰 주변을 청소하는데 가끔 제가 더 낯부끄러워질 때가 있어요. 외국인도 많은데 이들에게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줍게 하기가 정말 미안하기도 합니다. 미황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공간이라 사람들이 편안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화재 관람료나 주차료 등을 전혀 받지 않는데 가끔은 사람들이 사찰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는 듯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산과 사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자와 나란히 달마고도를 함께 걷던 스님은 자주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활짝 핀 동백꽃 한 송이, 겨우내 숨어 있던 옹달샘, 조그맣게 맺힌 산딸기를 발견할 때마다 스님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참 곱기도 하지”라고 혼잣말을 되뇌고 또 되뇄다. 그러다가 문득 기자에게 말을 건넸다. “뒤를 한 번 돌아보세요. 전혀 다른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지 않습니까.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죠. 산길도 이럴진대 우리의 인생길은 어떨까요. 바삐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지는 않는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필요해요.”
/해남=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금강 스님은 △1966년 전남 해남 △1982년 해남 대흥사 출가 △1985~1987년 광주 원각사 청소년 지도법사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집행위원 △1993년 중앙승가대 총학생회장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 △2000년~ 미황사 주지 △2002년~ 템플스테이 운영 △2005년~ 7박8일 참선수행프로그램 ‘참사랑의 향기’ 운영 △2014년 조계종긴급재난구호봉사단 진도 현장본부 부본부장 △2015년~ 달라이라마 방한추진회 상임대표 △2017년 산문집 ‘물 흐르고 꽃은 피네’

우영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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