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단독]경기위축 속 기업 엑소더스 현실화 ..."정부, 노동자 편만 들고 기업인 외면...이땅서 사업할 이유 없어"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환경 급변이 중소제조업체 이탈 부추겨

섬유 등 노동집약적 업종서 반도체 등 첨단 분야로 이전 확산

中企 국내에 머물수 있게 産團 입주 지원 강화 등 혜택 늘려야

베트남에 진출한 한 중소기업의 현지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분주하게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제공=중소기업중앙회베트남에 진출한 한 중소기업의 현지 공장에서 근로자들이 분주하게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제공=중소기업중앙회



“바이어의 요구에 맞춰 납기일을 지켜야 하는 공정 특성상 24시간 라인을 풀가동해야 하는데 근로시간을 줄이면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종업원 수가 30인을 넘긴 곳은 영세사업장 특별연장근로 혜택도 받지 못해 굳이 국내 공장을 고집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시화공단에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A사의 배진수(가명) 대표는 요즘 베트남으로 공장 이전 준비가 한창이다. 최저임금 인상보다는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공장 가동률 저하가 공장 이전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배 대표는 “이미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긴 동료 기업인 중에서는 2~3년 만에 투자비용을 회수했다는 이들도 꽤 있다”면서 “국내 경기는 갈수록 위축되고 정부는 노동자 편만 들면서 기업인은 외면하는데 굳이 이 땅에서 사업을 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견·중소 업계에 ‘코리아 엑소더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동남아시아 등 해외시장 공략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 노동환경 변화에 견디지 못하고 등 떠밀리듯 떠나는 것이다. 업종 특성상 24시간 풀가동이 일상화된 자동차·전자 부품업체나 노동력 투입 비중이 높은 섬유나 봉제 등의 업종일수록 해외 이전의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종합포장재 생산업체인 B사는 얼마 전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 공장 증설을 마쳤다. 준공식에는 베트남 정부 관계자를 포함해 수백명이 참석했다. 공장은 총 4,500평 규모로 국내외 200여개 거래처의 다양한 포장재와 페트병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회사 관계자는 “처음 공장 이전을 결정했던 3년 전만 해도 경영진 내부에서 고민이 많았지만 근로시간 단축 시행이 예정된 지금은 선견지명이었다는 자평이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C사도 최근 베트남 하노이에 공장 건립을 결정하고 기공식을 열었다. 내년께 하노이 공장을 설립하면 국내 생산라인에는 핵심공정만 남기고 나머지 공정은 베트남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최수형(가명) 대표는 “국내 공장에 투자하고 싶어도 환경 자체가 뒷받침하지 못한다”면서 “베트남은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지원을 약속하며 기업인의 마음을 잡기 위해 애쓴다. 기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굳이 환영받지 못한 한국에서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손이 많이 가는 속옷업체들의 해외 이전도 가속화하고 있다. 갈수록 가격 경쟁력이 추락하는 가운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국내에서 생산할수록 채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저가 대량생산의 대표 격인 속옷업체 BYC는 40년간 가동했던 전주 공장 생산을 최근 중단하고 창고로만 활용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는 100여명의 근로자가 연간 6,000만장의 언더웨어를 생산해왔다. BYC는 전주 공장을 닫는 대신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의 생산물량을 늘리기로 했다. 4만㎡ 규모인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는 연간 4,000만장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제조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는 만큼 굳이 국내 공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인도네시아 공장의 물량을 점차 늘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들의 해외 이전 후보지 1순위인 베트남 현지에서는 이미 공장 부지나 이전 절차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베트남 진출을 지원하는 조종용 중소기업중앙회 호찌민사무소장은 “최저임금·근로시간 등 고용정책 변화가 시작되면서 베트남 진출을 문의하는 중소기업 수가 부쩍 늘었다”면서 “경기 위축으로 마진율이 5% 밑으로 떨어진 중소제조업체로서는 부가가치를 높인다는 중장기적인 비전이라기보다는 당장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이전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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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내 업체의 베트남 하노이 생산법인에서 현지 직원들이 셔츠를 만들고 있다. /서울경제DB한 국내 업체의 베트남 하노이 생산법인에서 현지 직원들이 셔츠를 만들고 있다. /서울경제DB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베트남 현지 관계자도 “지난해에도 기업들의 문의가 있었지만 올 들어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정책 이슈가 가시화한 후에는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며 “당장 해외 이전을 하려 해도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상당수 기업이 국내에서도 한계상황에 내몰려 있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에는 최첨단 정보기술(IT) 업계에서도 연구개발(R&D) 부문을 통째로 해외로 옮기는 분위기까지 감지되고 있다. 반도체 소재기업 D사는 연구개발 부문을 통째로 해외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관련 분야의 전공자가 별로 없는데다 있던 직원마저 대기업으로 이직하니 고질적인 인력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이라도 기술인력이 풍부한 베트남으로 옮겨 안정적인 연구가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높아지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베트남의 경우 교육열이 높아 고급인력이 많은데 인건비는 중국의 3분의1 수준이다.

정부는 섬유·봉제·피혁 등 인건비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집약업종의 ‘탈(脫)한국’ 흐름은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성장통’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나 기술설비 등 최첨단기술이 집약된 분야까지 연구개발 부문 이전이 검토되는 등 산업 전반으로 해외 이전이 확산되는 만큼 지금이라도 심도 있는 논의와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영환경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이 맞물리면서 기업들이 향후 2~3년 뒤에 해외로 진출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역량 있는 중소기업들에 국내에 있어도 나쁘지 않다는 시그널을 주는 한편 노사정이 함께 생산성 향상 방안을 고민해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희 중앙대 교수도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인건비 감축과 현지 자재 조달이 쉽기 때문”이라며 “국내 투자요건 조성이나 산업단지 입주 혜택 강화 등 중소기업들이 국내에 머물 수 있도록 각종 혜택을 늘려 이들이 떠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민정·박해욱·허세민·심우일기자 jminj@sedaily.com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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