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을 한다는 일에 대해 발휘할 수 있는 상상력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꽃장식을 하는 플로리스트, 꽃을 활용한 작품을 만드는 작가, 꽃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테라피스트…….
여기서 한 발짝 나아가 꽃꽂이를 통해 개인의 성향과 리더십을 진단하고 기업이나 단체 등 조직을 위한 컨설팅을 하는 ‘꽃쟁이’가 등장했다. 서울 옥수동에서 꽃집 ‘수다팻(수다 F.A.T)’을 운영하는 손은정(41) 대표다.
‘꽃집을 하는 사람이 기업 구성원을 진단하고 조직 문화를 컨설팅한다고?’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지만 손 대표는 꽃을 접하기 전에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 국내 대기업, 스타트업 등에서 10년 가까이 몸담았던 조직 전문가다. 5년간 KB증권, LF(LG패션) 등 국내 기업뿐 아니라 여러 외국계 기업의 다양한 구성원 1,700명이 손 대표가 진행하는 워크숍을 거쳤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알게 됐다’, ‘상사의 리더십 스타일을 이해하게 되고 나니 소통이 더 잘 되는 것 같다’는 등의 호평이 나오고 있다.
“꽃집이 늘어나면서 ‘플로리스트는 이럴 거다’ 하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 매개가 꽃이었을 뿐이에요”
꽃쟁이의 학부 전공은 공대였다. 사명 ‘수다 F.A.T(Flower·Art·Techonology)’의 ‘T’는 손 대표의 전공에서 나왔다.
그는 연세대 산업공학과에 96학번으로 입학한 뒤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졸업 후 2001년 네트워크 보안 분야의 세계 강자인 정보기술(IT) 회사 시스코에 입사했다. 본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수 후 아시아태평양 지사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더 넓은 곳에서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고 또래들이 국내 대기업에 입사할 때 외국 취업 성공은 선망받는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는 게 손 대표의 설명이다.
“사실 전 출발선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에 불과했어요. 죽도록 열심히 일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지는 상황이 반복됐죠. 외국인은 진짜 동료가 되기가 쉽지 않았고 중요한 일을 맡기는 일은 없다 보니 자괴감이 컸어요”
그러다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겪은 외국 기업은 해고가 국내 기업에 비해 빈번하다 보니 경쟁도 셌다. 30대 주니어인 그는 40대 상사들과 20대 후배들 사이에 끼인 존재였다.
“40대 상사들이 언제 그만둘지 몰라 두려워하는 게 눈에 보이잖아요. 어디까지 올라가야 인간이 안전하다고 느끼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회의감이 커지다 보니 쇼핑중독 증세가 나타났다. 그는 “가격을 보지도 않고 사고, 사이즈가 안 맞아도 세일하면 사고, 살 때의 쾌감만으로 쇼핑을 했다”며 “정작 쇼핑하고 나서는 입어보지도 않았을 정도니 심각했다”고 말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2008년 시스코 한국 지사로 소속을 옮기고 국내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아름다운 것으로 나를 채우자’는 생각으로 퇴근 후 자기계발을 시작했다. 옷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옷을 배우기도 하고 그림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접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꽃이었어요. ‘꽃 자체가 예쁘다 보니 내가 잘 하지 않아도 예쁘겠다’하는 단순한 생각이었죠”
시작은 즉흥적이었지만 차곡차곡 내공을 쌓아갔다. 주말과 평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프랑스의 플로리스트 대가 까뜨린 뮐러의 국내 전문가 과정을 밟았다. 그러다 LG전자 해외전략 파트로 이직하면서 프랑스 법인에서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생겼다. 이때 프랑스 본토의 까뜨린 뮐러의 플라워 스쿨에서 수업을 들으며 시야가 넓어졌다.
전율이 일었던 사건은 한 소녀의 사진을 본 데서 시작됐다. 아프리카 잠비야에서 한 소녀가 화분에 든 꽃을 들고 웃고 있었다.
“호기심이었어요. ‘꽃이 뭐길래 저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일까”
아프리카에 단기 봉사활동을 떠나게 되는 계기는 당연히 그 한 장의 사진이었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뒤 꽃으로부터 배운 건 꽃꽂이 기술이 아닌 삶에 관한 태도였다. 그는 스스로 꽃으로 자신을 수련한 셈이라고 표현했다. 꽃을 통해서 삶이 유한하다는 걸 매달, 매주 확인하는 식이었다.
‘피고 져야 꽃이다’
‘꽃이 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꽃을 대하다 보니 삶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어요. 시간은 유한하다는 걸 알다 보니 일도 사람도 매 순간 잘 하려고 해요. 삶에 대한 레슨을 받는 것 같아요”
그 시기 꽃장식을 배우면서 심리를 치료하는 원예심리학도 공부했다. 꽃으로 수련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딸 넷 중 첫째였던 그는 아버지와 유난히 돈독한 사이였다. 자신의 꿈이자 원동력이 됐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속으로는 약해지는 일들이 반복됐다.
그는 “하루 꽃을 봤다고 해서 바뀐 게 아니라 계속 꽃을 통해 저를 수련한 것”이라며 “죽음이나 노화를 슬프지 않게 봐야 하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꽃을 곁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런 원칙은 사업에도 적용돼 그는 꽃집에서 흔하게 쓰는 생화유지제도 쓰지 않는다. 유행하는 드라이플라워도 사실 꽃의 본질을 잃어버린 ‘가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2013년 서울 대치동에서 처음 꽃집을 열었다. 꽃길만 펼쳐진 건 아니었다. 투입 대비 산출의 ‘최적화’에 익숙한 공대생에게 꽃 사업은 비효율이 많았다.
그는 “좁은 공간에서 별도의 유통망을 확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꽃집 창업이 쉽다”며 “이 때문에 ‘나도 꽃집이나 차려볼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짜 문제는 창업 이후”라고 털어놨다.
일단은 재고 관리가 어렵다. 손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꽃집 운영이 신선식품 유통보다 쉽지 않은 이유는 꽃은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이 다른 제품군에 비해 너무 짧다는 것. 재고 관리를 거의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재고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수요 예측은 더더욱 어렵다. 특정 달에 특정 꽃이 많이 소비되는 것과 수요 예측은 별개라는 설명이다.
또 꽃집은 우후죽순 생기는 상황에서 서울에 꽃을 공급하는 수도권 화훼농지는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다. 이 때문에 재료인 꽃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도 자영업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거기에 꽃 선물이 편리하고 실용적인 것 위주로 대체되고 있어 새로운 종류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그는 “꽃 말고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늘었다”며 “지금 꽃의 경쟁자는 카카오톡 선물하기로 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창업 후 5년이 지났지만 이전의 억대 연봉에 비하면 손 대표에게 돌아가는 몫은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꽃을 대하는 일은 여전히 그에게 ‘가장’ 좋은 일이다.
그는 정기배송에 집중하는 ‘꾸까’ 등 다른 업체와 달리 꽃을 통한 조직 컨설팅과 워크숍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심리학 박사와 함께 꽃꽂이 방식을 통해 구성원의 심리 진단을 하고 이를 조직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5년간 워크숍을 통해 1,700여명의 조직 구성원을 진단한 경험이 든든한 자료가 됐다.
워크숍의 내용은 이렇다. 구성원이 함께 참여할 때 제한된 꽃의 종류 안에서 서로 꽃 재료를 나누고 자신만의 꽃꽂이를 완성한다. 누구 하나 같은 모양으로 꽃을 꽂는 법이 없다. 빼곡하게 바구니를 채우는 사람, 듬성듬성 꽃을 꽂는 사람, 조직도를 그리는 사람, 정점에 하나의 꽃을 두는 사람 등 제각각이다.
“사람은 낯선 무언가를 대할 때 내가 익숙한 것을 다루는 방식대로 다룬다는 거예요. 꽃꽂이에도 자기가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다만 꽃꽂이는 재료가 워낙 예쁘다 보니 그림 치료, 음악 치료 등에 비해서 개인별로 격차가 벌어지지 않아요. 누구도 드러난 자신의 성향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어요”
목적은 나에 대해 알게 하는 것이다. ‘자기 알기’. 그는 “소통을 하려고 해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며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직면했을 때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인데 꽃을 통해서는 적나라하지 않게 자기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나면 심리 분석에 있어 일종의 바이블로 만들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자기 알기’에 있어서 수다팻의 프로그램이 바이블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더 많은 사람이 더 아름다운 것을 통해 스스로를 알았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목표는 현재 3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내년까지 정직원 10명에게 합당한 대우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을 이루는 것이다. 주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예술창작자와 플로리스트가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소박한 꿈이다.
꽃집 주인에게 오는 단골 질문인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느냐’에 대해서는 난감하다며 고개를 젓는다.
“저한테 어느 꽃이 더 좋느냐고 하는 건 아시아인을 좋아하느냐 유럽인을 좋아하느냐 묻는 것과 같아요. 같은 종이라도 사람처럼 생김새와 개성은 제각각이에요. 각자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다른 꽃이 있을 뿐 안 예쁜 꽃은 없어요. 들여다보면 다들 느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