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여러 분야의 혁신기술이 융합돼 모든 산업 분야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과기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도 경쟁력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종전의 정책이나 연구 풍토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R&D의 비효율을 걷어내지 못하고 글로벌 혁신경쟁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과기 R&D, 투자는 모범생 성과는 열등생=우리나라는 과기 분야에서 ‘투자 모범생’이다. 지난 2016년 기준으로 69조4,000억원을 R&D에 투자해 미국·중국·일본·독일에 이어 5위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용의 비중은 2015년 기준 4.24%로 단연 1위다.
경제 규모에 비해 과기 분야에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올 2월 발표된 ‘2017년 과기혁신역량평가’에서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7위를 차지해 전년도에 비해 두 계단 내려앉았다. 지난해 평가에서 새로 포함된 이스라엘이 단숨에 3위를 차지했고 2016년 6위였던 네덜란드에도 밀렸다.
34개 중 7위면 상위권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지만 세부항목을 뜯어보면 한국 과기 경쟁력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은 GDP 대비 정부 R&D 예산(1위)이나 연구개발 투자 총액(4위) 등 투자 순위는 높았으나 창업활동지수(23위)나 R&D 투자 대비 기술수출액 비중(28위)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연구원 1인당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논문 수 및 인용도는 33위로 꼴찌를 간신히 면했다. 비유하자면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셈이다.
이 같은 R&D 비효율성의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법은 다양하게 제시돼 있다. 단기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R&D가 이뤄져야 하고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보장하는 연구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과학기술 거버넌스를 정립해 부처 간 칸막이를 해소하고 R&D 시너지 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하고 범부처 간 협력체계도 강화했다. 또 프로젝트 위주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PBS제도를 개선하고 연구 행정도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도 꾸준히 확대해 지난해 1조2,600억원이던 기초연구사업 예산은 오는 2022년 2조5,200억원으로 두 배 늘어난다.
◇4차 산업혁명에 걸맞게 기초과학 패러다임 전환 시급=이 같은 R&D 투자 확대와 연구자 중심의 연구환경 조성은 과기 경쟁력 및 혁신 역량을 강화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초과학 투자를 늘리고 연구 몰입을 저해하는 규제·제도를 개선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이 역시 3차 산업혁명 시대의 R&D 패러다임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주요 기술을 R&D에 적극 활용해 연구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실패 위험을 줄이는 시도에 나선 것에 비하면 구시대적인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미국 로런스버클리연구소나 일본 이화학연구소, 독일 막스플랑크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면 앞으로는 구글·IBM·애플처럼 AI 기술과 빅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 기업이 기초과학 분야의 경쟁상대가 될 것”이라며 “풀뿌리 연구를 강화한다며 R&D 예산을 나눠 먹기 할 때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데이터분석가 등 관련 인력을 적극 육성하고 데이터 분석 하드웨어 공급에 나설 때”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딥마인드는 영국 국립의료서비스(NHS)와 계약을 맺고 건강 관련 정보 1,600만건을 분석해 유방암 진단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딥마인드의 모기업인 구글은 생명과학 부문 자회사인 베릴리를 통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의 우수 과학자들을 대거 영입해 수천만건의 건강 관련 빅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질병 진단 시스템을 개발하고 신약 후보물질을 찾고 있다. 김 교수는 “과기계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성공하면 파급력이 큰 고위험 연구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실패 위험을 현저히 낮출 수 있다”면서 “기초과학도 속도의 경쟁에 접어든 상황에서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 관점의 R&D 투자를 해야 한다는 도그마에서 벗어날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