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0위인 러시아가 2002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의 4강 신화를 2018러시아월드컵에서 재연하려 하고 있다.
조별리그 첫판에 사우디아라비아를 5대0으로 돌려세울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러시아는 이집트를 3대1로 잡고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 짓더니 2일(이하 한국시간) 끝난 16강에서 ‘무적함대’ 스페인(10위)마저 침몰시켰다. ESPN은 “2002년 당시 개최국 한국의 놀라운 성과를 러시아가 재연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한국은 2002한일월드컵에서 2승1무로 사상 첫 16강을 이룬 뒤 16강에서 이탈리아, 8강에서 승부차기로 스페인을 넘고는 4강에서 독일에 0대1로 졌다.
16년 전 한국의 8강 상대였던 스페인을 러시아는 16강에서 역시 승부차기 끝에 집으로 보냈다.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러시아는 전반 12분 세르게이 이그나셰비치의 자책골로 끌려갔으나 전반 42분 아르툠 주바의 페널티킥 득점으로 동점에 성공했다. 후반과 연장 전·후반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고 러시아가 4대3으로 이겼다. 구소련 시절이던 1970년 멕시코대회 이후 48년 만의 월드컵 8강 진출이다. 축구공 하나가 세계 최대 영토 곳곳에 퍼진 1억4,400만의 러시아 국민을 흥분에 빠뜨렸다. 러시아는 본선 참가 32개국 중 FIFA 랭킹이 가장 낮다.
이날 수훈갑은 단연 이고르 아킨페예프(32·CSKA모스크바)였다. 승부차기 2대2에서 세 번째 키커 코케의 슈팅 방향을 읽어 손으로 막아내더니 4대3으로 앞선 상황에서는 다섯 번째 키커 이아고 아스파스의 가운데 슈팅을 발로 걷어내며 혈투를 끝냈다. 승부차기 전 스페인의 유효슈팅 9개 중 8개를 막아내기도 했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의 악몽을 완벽에 가깝게 극복한 것이다. 아킨페예프는 당시 한국과의 조별리그 1차전 때 정면으로 날아오는 이근호의 중거리 슈팅을 잡다 뒤로 흘려 실점했고 러시아는 1대1로 비겼다. 러시아는 2무1패로 탈락했다. 브라질에서 국제 망신을 당했던 아킨페예프는 지난해 10월 한국과의 평가전 때도 지동원의 어렵지 않은 슈팅을 막지 못했다. 국내 팬들은 ‘고마운’ 아킨페예프를 ‘기름손’이라고 불렀다.
아킨페예프는 그러나 185㎝로 골키퍼로서는 크지 않은 키로도 A매치 110경기(스페인전 포함) 동안 골문을 지킨 러시아 간판이다. 이날 세계 최고 중 한 명인 다비드 데헤아와의 수문장 자존심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며 레프 야신(러시아 전설의 골키퍼)의 후계자라는 별명을 당당히 되찾은 것이다. 경기 MVP로 뽑힌 아킨페예프는 “신에게 감사드린다. 행운이 우리 쪽으로 온 것뿐”이라며 “MVP는 우리 팀과 러시아팬들 전체가 받아야 한다”고 자세를 낮췄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신 아킨페예프를 대통령에 앉히자”는 장난 섞인 캠페인이 확산하고 있다.
2010남아공월드컵 챔피언인 스페인은 개최국 상대 전패의 지독한 징크스를 이어갔다. 2002한일월드컵 한국과의 8강에서 승부차기 끝에 3대5로 지는 등 스페인은 월드컵에서 개최국 상대 4전 전패를 기록했다. 이날 무려 1,031회의 패스 성공(러시아는 204회)과 볼 점유율 75%의 압도적인 흐름에도 146㎞(스페인은 137㎞)를 뛴 러시아에 발목 잡혔다. 베테랑 미드필더인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를 후반 중반에나 투입한 감독에게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니에스타는 12년간의 대표팀 생활을 정리하고 이날 은퇴를 선언했다. 5백 수비로 나선 러시아는 유효슈팅 단 1개로 승리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러시아의 8강 상대는 크로아티아다. 오는 8일 오전3시 4강 티켓을 다툰다. 크로아티아도 덴마크와 1대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대2로 이겼다. 골키퍼 다니옐 수바시치는 승부차기에서 세 차례 선방으로 크로아티아에 20년 만의 8강을 선물했다. 경기 MVP는 덴마크 골키퍼 카스페르 슈마이켈이 받았다. 그는 연장 후반 11분 상대 루카 모드리치의 페널티킥을 잡은 데 이어 승부차기에서 두 차례의 선방으로 팀 패배에도 팬들을 매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