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대 파워게임에 국민연금이 휘둘린 거죠’(전직 국민연금 관계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인선을 놓고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에 의해 내정된 줄 알았다’는 곽태선 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의 폭탄발언으로 지난 주 내내 시끄러웠던 국민연금. 덕담에서 권유로 청와대는 해명을 번복했지만, 8일 국민연금 내부의 분위기는 실망 그 자체다. 지난 정부에서 삼성물산(028260) 합병 찬성 논란으로 정치권 외압을 비판했던 현 정부 역시 다를 것 없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100년 이상 지탱해야 할 국민의 노후자금을 5년 임기의 정부가 제멋대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의 부정적인 시각도 늘고 있다.
세계 3위 규모의 연기금인 국민연금이 역대 정부마다 반복된 인사개입에 시달리자 지금이라도 독립성을 확보하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공약에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내세웠지만 실제 세부 내용에는 인선부터 구체적인 투자 방향까지 정부가 일일이 간섭하는 상황이다.
지난 정부에서 기금운용위원회를 정부에서 독립해 공사화하겠다는 방안을 폐기하고 대신 관료를 내려보내겠다며 정 반대 정책을 추진했다. 수익성 있는 공공투자를 하겠다면서 코스닥 투자 확대·임대주택 사업을 위한 채권 인수 등을 밀어 붙였지만 금융투자업계는 물론 국민연금 내부에서도 위험한 투자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정부 출범 2년째인 지금까지 해당 정책이 지지부진한 이유다.
외형적인 ‘공사화’ 독립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처럼 정부가 개입하고 정치권이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상황에선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는 지적이다. 외풍에 못 이겨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CIO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임기를 보장하고, 성과에 따른 보상도 충분히 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업계 최고의 전문성을 요구하면서도 연봉은 민간 업계에 비해 낮은 수준이고, 퇴임하면 3년간 재취업이 금지되는 것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역할이다.
국민연금이 7월 말 도입하기로 한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역시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비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장이 공석인 상황에서 교수가 주축인 9명 정원의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가 자문하는 형식으로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이다. 실제 실행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하지만 당사자는 배제되고 남의 손에 맡겨 진행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을 겪어본 안팎의 인사들은 당장 조직을 분리하지 못할 바에는 현실적으로 국민연금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인물에게 기금운용본부장을 맡길 것을 주문하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이번에는 국민연금의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 와서 조직부터 안정시키고 본연의 투자 활동에 집중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 공단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국민연금은 수년 전부터 해외 대체투자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는데 국민연금 내부인사 외에는 해외 대체 투자로 수 조원을 굴리는 경험을 한 인물이 없다”면서 전직 국민연금 인사 중에 기금운용본부장을 영입하라고 조언했다. 장기적으로는 청와대나 정부가 아닌 기금운용위원회가 기금운용본부장을 뽑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