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 여순사건은 1만여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948년 10월19일 제14연대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은 지역에 따라 점령된 지 3~7일 만에 진압됐다. 점령과정과 점령지 탈환과정, 그리고 이후 전개된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군경과 반군에 의해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거대한 폭력의 상처로 남아 있는 여순사건을 두고 반란인지 아닌지에 천착해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단언건대 이 사건의 본질은 진영논리와 비이성적 분노에 이뤄진 무고한 양민학살이다. 통제받지 않은 폭력에 의해 초래된 비참한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따라서 항거불능 상태에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과 유족의 응어리진 한을 푸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치유와 화해가 이뤄진다. 역사적 교훈을 얻는 길이기도 하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이러한 당위성에서 지난해 4월에 발의됐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희생자 위령 사업과 보상이 주요 내용이다. 수많은 사람의 증언과 유족들의 애타는 진정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비슷한 양민학살 사건인 거창사건·노근리사건·제주4·3사건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도 중요한 동인이다.
이 특별법에 대한 국방부의 반대 논거가 가관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를 완료했다는 것, 보상금 지급이 막대한 재정 부담을 초래한다는 것, 위령 사업은 전국단위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해왔다. 계엄령 선포와 즉결처분권도 합법화하려 한다. 그러니 진실화해위원회의 사과 권고도 무시한다. 국방부의 반대 논거에 대한 반론은 아래와 같은 팩트(사실관계)로 대신한다.
첫째, 1949년 11월1일 전남도가 조사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1만1,131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희생자 수는 신고 위주로 이뤄져 2,043명에 불과하다. 둘째, 우리나라는 보상금을 감당할 만큼 정신적·경제적으로 성장했다. 셋째, 다른 지역은 이미 위령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넷째, 제헌헌법 제64조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계엄령과 즉결 처분권은 1948년 10월에 발령됐고 계엄법은 1년 뒤인 1949년 11월에 제정됐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여순사건은 양민학살에 본질이 있다. ‘빨갱이’라는 멍에가 씌워진 희생자들과 ‘빨갱이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은 유족의 망가진 삶을 생각하자. 1982년까지는 연좌제에 의해 공직 진출 길마저 막힌 그들의 좌절을 생각해보자. 거대한 국가권력에 억눌려 침묵을 강요당해온 한과 슬픔·분노를 반드시 생각하자.
그리고 여순사건 특별법을 바라보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