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 들어서 기업 관련 규제법안 800건이 쏟아졌습니다. 어렵게 규제를 열 몇 개 풀어도 한쪽에서는 백 개씩 쏟아지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입법부의 협조가 필요하고 규제 총량 관리도 해야 합니다.”
박용만(사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3회 제주포럼’ 개막식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참담한 심경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대한상의 회장을 역임해온 지난 5년간 ‘규제 완화’를 셀 수 없이 강조했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천 번, 만 번을 얘기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 절박한데 왜 효과는 전혀 없었는가에 대해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박 회장은 서비스 산업의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용유발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선진국은 대체로 70~80%인데 우리나라는 59%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9번째인데 이에 비하면 서비스 산업 규모는 더욱 형편없다는 지적이다. 박 회장은 “신산업 분야와 각종 면허로 막혀 있는 기득권에 손을 대서 과감하게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며 “안전하게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어서는 내려가고 있는 경제 곡선을 되돌리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 회장은 과도한 개인정보보호법의 문제를 지적했다. 개인정보로 빅데이터를 형성해야 여러 서비스나 산업이 파생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는데 정보보호를 이유로 모든 것을 막아버리면 빅데이터 형성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빅데이터는 국경이 없는 만큼 여러 나라가 협업해 큰 통계적 추론이 가능해지고 획기적 서비스가 가능해진다”면서 “한국은 규제환경이 너무 복잡해 (타 국가들이) 한국을 배제하고 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 회장은 미국의 개인정보 활용 사례도 소개했다. 미국 대도시의 경우 사람들의 직업·나이·거주지 등을 데이터로 확보해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택시를 주로 배차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차를 쉽게 타서 좋고 교통회사는 빈 차 없이 다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같은 사업을 구상하기 어렵다. 현금인출기 역시 마찬가지. 미국에서는 현금인출 시 비밀번호·얼굴인식 이외에도 휴대폰이 이용자 옆에 있는지까지 파악해 보안율을 높이지만 한국에서는 위치정보 제한으로 이조차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규제 완화를 위한 방법론으로 ‘공무원 신분 보장’ ‘법과 규범에 대한 인식 전환’ 등을 언급했다. 박 회장은 “규제를 혁파하거나 개혁을 하면 담당 공무원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면서 “어떤 공무원도 개혁을 향해 나설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또 법이 아닌 규범의 테두리에서 사전 규제가 아니라 사후 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박 회장은 “규제를 확 풀어버렸을 경우 올 혼돈에 대한 정부의 불안이 과도하다”면서 “이미 해당 산업 종사자들은 법을 위반하지 않으며 규범의 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경험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최저임금 인상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박 회장은 솔직한 의견을 내놨다. 박 회장은 “최저임금은 사용자단체가 불참한 상태에서 결정됐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다”면서 “영세할수록, 소상공인일수록 한계기업이 상당히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영향은 제한적이라면서도 자유무역 축소 움직임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남북문제와 관련해 박 회장은 “북한의 개혁개방이 이뤄지면 한국이나 중국·일본 모두 비슷한 기회를 갖게 된다”며 “먼저 가서 깃발만 꽂으면 될 정도로 유리한 입장이 아닌 만큼 남북 민관협의체 등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제주=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