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인종 서열주의가 19세기 후반 개항기부터 형성됐으며 미국 중심의 미디어 문화를 소비하면서 강화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는 2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 한국심의대응 시민사회 공동사무국’ 주최로 열린 ‘한국사회 인종차별을 말하다’ 보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제했다.
박 교수는 “많은 한국인이 백인을 선망하고 흑인이나 비(非)백인은 멸시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면서 “우리가 미국인의 인종주의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인종주의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어 개항기로 올라간다”고 짚었다. 그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 이전만 해도 한반도에는 인종 개념이 없었다”면서 “굴욕적인 개항을 당한 조선의 엘리트들이 백인들의, 서양 제국주의의 인종 서열 의식을 빠르게 받아들였다”고 지적했다.
개화파였던 박정양이나 유길준이 미국의 노예제를 보며 백인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됐고, 이런 백인우월의식이 윤치호와 서재필이 운영한 ‘독립신문’을 통해 인종의 적자생존 논리의 ‘개화 담론’으로 보급됐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조선이 독립보다는 먼저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봤던 자강파 지식인들이 이 지점에서 ‘열등한 조선 인종이 황인종의 맹주인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친일파의 논리를 발전시켰다면서, 장지연과 이광수가 을사조약 후 친일파가 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서구 인종주의는 독립 후에도 미국 중심 세계 질서가 이어지면서 함께 지속됐다”면서 “미국 대중문화를 수입하면서 우리는 ‘미국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미디어로 인해) 아름답다는 것은 백인처럼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게 됐고, 흑인은 범죄자·마약 중독자, 이슬람은 테러와 야만의 종교로 인식됐다”면서 “1980∼1990년대까지 미국 드라마,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 서열주의와 유사 백인 의식을 강화했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의 인종주의가 ‘보통의 한국인보다 짙은 피부색을 지닌 사람’에 대한 차별, 그리고 ‘외관상 차이가 없는 중국인 등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 두 가지로 나타난다고 나눴다. 그는 “우리나라는 다문화 열풍이 불기 전까지 ‘단일 문화’를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여겼다”면서 “근대 국가가 문화의 동질성을 집요하게 추구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부 구성이 동질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우리를 지배했던 의식 구조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면서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며, 이를 위해 인종차별금지법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제언했다.
이날 보고대회에서 재단법인 동천 이탁건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이주 아동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변호사는 “우리나라에 이주 배경 아동·청소년이 15만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미등록 체류 아동은 2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면서 “법무부는 고교 졸업 때까지의 체류를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지만, 현 정책은 ‘추방 유예’ 차원이라 고교 졸업 후에 대한 대책이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주 아동에 대한 별도 보호 근거도 없어서 성인과 동일하게 단속·강제퇴거는 물론 구금까지 가능한 상황”이라면서 “최근 3년간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외국인 아동 67명이 구금됐다”고 비판했다. 또한 이주 아동을 강제퇴거할 경우 다른 가족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말조차 통하지 않는 국적국으로 강제송환되는 등 아동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며 우리나라도 유엔 아동권리위 권고나 선진국 수준에 준하는 체류자격을 정규화하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이날 보고대회는 올해 12월 예정돼있는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 대한민국 제17∼19차 정부보고서 심의를 앞두고 정부에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전하고, 최근 예멘 난민 대거 입국에 따른 난민 혐오 현상을 진단하기 위해 마련됐다. 대회는 변호사회관에서 이튿날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대회에는 공익법센터 어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두레방, 민변,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조, 아산이주노동자센터,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동, 이주와인권연구소,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등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했다.
/권혁준인턴기자 hj7790@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