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광장’ 등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 최인훈(사진)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4개월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1934년(공식 출생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월남했다. 지난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6학기를 마쳤으나 전후 분단의 현실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데 갈등을 느끼고 1956년 중퇴했다. 1958년 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장교로 복무했고 1959년 군 복무 중 쓴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자유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가 한국 문학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기념비적인 소설 ‘광장’이다. 1960년 발표한 이 소설은 당대 지식인·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읽히며 후배 문인과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해방-전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깊은 갈망과 고뇌를 그리며 남북 간 이념·체제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드러냈다. 전쟁포로가 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하는데 이는 그가 남한과 북한에서 원하던 광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푸르고 넓은 바다를 본 그는 광장의 모습을 발견하고 몸을 던진다.
‘광장’은 출간 후 현재까지 통쇄 205쇄를 찍었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2004년 국내 문인들(시인·소설가·대학교수·평론가 등)이 뽑은 ‘한국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인은 ‘광장’에 대해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1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고 말하고는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광장’을 필두로 그는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분단 현실을 문학적으로 치열하게 성찰했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평했다. 전망이 닫힌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1963)’,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파격적 서사 실험을 보인 ‘서유기(1966)’, 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풍자소설 기법으로 표현한 ‘총독의 소리(1967~1968)’ 연작, 20세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동시대인의 운명을 조망한 대작 ‘화두(1994)’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고인은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등을 받았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는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문학계에서는 그를 “근대성에 대한 관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 새로운 형식의 탐구를 바탕으로 신이 죽은 시대,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신비주의와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방법론으로 개발한 내면성 탐구의 절정에 선 작가” “문학작품을 썼다기보다 차라리 ‘문학을 살았다’는 표현에 적실한 작가”로 평한다. 다만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최근까지도 미리 써둔 작품이 여러 편이고 곧 신작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으나 끝내 신작을 세상에 내보이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 여사와 아들 윤구·윤경씨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02-2072-2020)에 차려졌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진다. 위원장은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이 맡았다. 영결식은 오는 25일 오전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강당에서 열린다. 발인은 영결식 이후이며 장지는 ‘자하연 일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지영동 45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