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가 국정농단 사태 직후 ‘진보 판결을 내놓아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펼치다 하야·탄핵 정국에 들어서자 권력 향방을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법원행정처는 31일 법원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410개 문서파일 중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196개 파일의 원문을 사법부 전산망에 공개했다. 총 파일 수는 228개였지만 중복파일 32개는 제외했다.
문건 곳곳에는 예상대로 박근혜 정부 당시 사법부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해 전방위로 로비한 흔적이 담겼다. 더욱이 한 ‘대외비’ 문건을 통해서는 국정농단 사태 직후 아예 사법 기조를 바꾸라는 황당한 주문을 내리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내내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협조 방안을 구상하다 상황이 바뀌자 법관들에게 “정치적으로 진보 판결을 내리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해당 문건은 “대한민국 중도층의 기본 스탠스는 정치는 진보, 경제·노동은 보수”라며 “대북 문제를 제외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과감히 진보적인 판단을 내놓아야 한다”고 적시했다. 또 “표현·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해 계속 진보적 판단을 내놓아야 한다”며 “(촛불집회) 금지통고 집행정지, 백남기 부검영장 발부는 매우 시의적절한 결정”이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탄핵과 대선 전 시점임에도 민주당 계파 분석표까지 만들고 개헌을 좌우할 친노·친문 인사,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전해철 의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를 정치기관으로 격하하기 위한 자체 개헌대응반도 구성했다. 4·13 총선 다음날에는 “여당의 압도적 패배로 현 정부는 사실상 식물정부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사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판단하는 조직이 아니라 권력을 좇는 조직임을 자인한 부분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상고법원 입법을 위해 우호세력을 조성하고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전략을 담은 문건도 상당수 포함됐다. 사법부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 전략’ ‘상고법원 법률안 정기국회 통과 전략’ 등의 문건을 작성하며 청와대·국회·언론 등을 모두 전략 상대로 삼았다. 상고법원에 반대하던 하창우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에 대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이미지를 부각하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판사 출신 서기호 전 정의당 의원에 대해서는 “고립시켜야 한다”고 분석했다.
‘법사위원 접촉 일정 현황’ 문건에는 현직 판사는 물론 대법관까지 동원해 국회의원과 접촉하는 방안을 담았다.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게는 인척인 민일영 대법관을, 전해철 의원에게는 동기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을 붙이는 식이다. 법관과의 친분을 활용해 각종 재판을 여야와 거래했을 가능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앞서 특조단은 5월25일 조사보고서를 발표하면서 410개 파일의 제목만 공개했다. 6월5일 마지못해 게시한 파일 원문도 98개에 그쳤다. 특조단장을 맡은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당시 “나머지 파일은 사법행정권 남용과 거리가 있어 공개할 필요가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재판거래 의혹이 끝없이 늘어난데다 국민적 공분이 커지면서 결국 사법부는 꼬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