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불 참사는 채권단과 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든 사회적 요구를 무시한 채 진행된 긴축에 굴복한 결과입니다.”
지난달 23일 그리스 아테네 인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최소 93명이 숨지는 등 역대 최악의 피해가 발생하자 한 노동자단체가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며 쏟아낸 논평이다. 정부가 국제채권단이 제시한 재정 흑자 목표를 맞추느라 공공서비스 지출을 대폭 줄인 결과가 엄청난 비극으로 되돌아왔다는 지적이다. 그 근거로 지난해 그리스의 소방 부문 예산이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인 지난 2009년 대비 1억유로 가까이 급감한 사실을 제시하며 삭감된 예산 탓에 화재 진압 장비와 인력 등이 턱없이 부족해 화재 피해를 키웠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처럼 긴축이 산불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는 오는 20일 8년간의 기나긴 구제금융을 공식 졸업한다. 유럽 채권국 19개국이 지난 6월2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나 그리스 구제금융 종료와 부채 경감 계획을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구제금융 기간 내내 진행된 혹독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을 끝내고 드디어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에 그리스 정부 관계자들은 “새로운 새벽이 열렸다”며 자축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던 그리스는 2010년 이래 국제채권단으로부터 세 차례에 걸쳐 3,26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아 파산 위기를 넘겼다. 8년간의 금융지원은 확실히 그리스 경제를 바꿔놓았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1년 -9.4%까지 고꾸라지며 최악을 치닫다 지난해 1.4%로 플러스 전환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GDP 대비 기초 재정수지는 2009년 10% 이상 적자에서 올해 약 2.9%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에서 그리스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있다. 3대 국제 신용평가사는 올 들어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모두 상향 조정했다.
하지만 그리스가 갈 길은 멀다. 구제금융 졸업으로 더 이상 금융지원은 받지 않지만 앞으로 빚을 갚기 위해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채권국들의 감시를 수년간 받아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과 그리스는 구제금융 졸업 조건으로 오는 2020년까지 GDP의 3.5%, 2060년까지 2.2%의 재정 흑자 유지를 제시했다. 그리스 정부와 국민이 구제금융 이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명암이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구제금융 종료로 그동안의 자본통제가 완화되면서 자립적인 경제정책 수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구제금융 종료 선언 이후 그리스 정부는 7월1일부로 자본통제 완화를 단행해 월 현금인출 한도를 2,300유로에서 5,000유로로, 해외여행 시 현금 한도액도 2,300유로에서 3,000유로로 조정했다. 시장의 반응도 좋다. 그리스는 5년물 국채를 연 4.625%에 발행해 30억유로를 조달하며 3년 만에 국채시장에 복귀했다. 대부분의 기관도 올해 그리스가 2%대 안팎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며 8년간의 구제금융이 성공적으로 종료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실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이 여의치 않다. 전문가들도 그리스의 구제금융 졸업에 대해 “거액의 빚을 장기간에 걸쳐 상환해야 하고 잠재적인 성장력을 높여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마주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구제금융을 받았던 엄청난 빚을 다 갚으려면 앞으로 30~40년 동안 긴축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적 자립에 대한 기대와 달리 그리스의 장기 전망이 밝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IMF도 지난달 말 보고서를 통해 “그리스의 재정 흑자 달성 계획이 과도하게 낙관적”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3차에 걸친 금융지원으로 부풀어 오른 국가부채 잔액은 지난해 기준 GDP의 약 1.8배에 달한다. 공식 실업률도 20%대로 유로존 평균의 세 배 수준이다.
최근 통과된 긴축법안에는 세금 인상과 연금 추가 삭감, 의료서비스 감축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인들의 연금은 2019년 1월1일부터 최대 18%까지 추가로 삭감되고 2020년부터는 소득세 면세 기준이 하향 조정된다. 2022년까지 공무원 채용 및 지출 부분도 더 엄격히 관리될 예정이고 공기업도 팔아야 한다. 이 같은 추가 긴축을 통해 연간 약 50억유로를 절감, 재정 흑자 규모를 확대한다는 것이 그리스 정부의 계획이다.
구제금융 졸업 후에도 한동안 기나긴 긴축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국민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어 이를 어떻게 달래지도 관건이다. 그동안 열 차례 이상 연금 삭감을 감내하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던 그리스 국민들은 추가 긴축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고 있지만 사실상 관광업에 의존하는 경제 특성상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 외에 국가 회생을 위한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다. 그리스 내에서 “구제금융 종료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긴축 지속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내년 9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유로 개혁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 역시 그리스의 경제성장에 의구심을 품게 하는 또 다른 악재다. 야니스 스투르나라스 그리스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개혁이 후퇴할 경우 취약한 투자자들의 신뢰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FT도 사설을 통해 “수년간 진행된 긴축 조치의 영향으로 경제가 받은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은 불확실하다”며 “경제에 충격이 생기면 다시 금융지원이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