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베테랑 배우 이성민도 “‘공작’은 도무지 편하게 연기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간만에 하는 완벽한 정극 연기에 대사 중간 중간 숨 쉴 틈이 없었다. ‘그동안 잘 못했구나’ 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밀려왔다. 배우가 정적인 상태로 책상 밑에선 마치 칼을 날리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구강액션을 소화해내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영화 ‘공작’(감독 윤종빈)은 1990년대 중반,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파헤치던 안기부 스파이가 남북 고위층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첩보극.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고(故) 김대중 당시 대선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흑금성(박채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지난 5월 제71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북한의 실세이자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고 있는 대외경제위 처장 리명운을 연기한 이성민은 마치 ‘쉼표 없는 악보를 연주한 느낌이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리명운은 굉장히 정제돼 있는 인물일 뿐 아니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간미와 호연지기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흑금성(황정민)의 카운터파트로서, 평온한 상태로 긴장과 리듬, 템포의 고조를 만들어내야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배우인 나를 통해 구현되지 않아 정말 힘들었어요. 첫 촬영이 너무 창피했죠. 자세도 바꿀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어요. 그랬다가 신의 긴장감이 뚝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서로 눈만 보면서 대화하다가 내가 숨도 안 쉬고 대사를 했구나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동안 참 연기를 더럽게 했구나 싶어 후회했어요. 결과적으로 ‘공작’은 힘들게 했지만 보람 있었던 현장이었어요.“
‘공작’은 이성민에게 20대 연극 배우 시절, 선배들한테 야단 맞고 눈물 흘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며 밥을 먹고 산다는 게 부끄럽다는 자괴감에 빠졌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처음 연기 공부할 때도 생각이 났어요. 그때는 대본의 어디서 숨을 쉬어가야 하고 눈을 깜빡 거려야 하는지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연기했어요. ‘공작’의 리명운을 만나 다시 그 때를 떠올리게 됐어요. 그동안 너무 편하고 익숙하게 연기한 것이 아닌가도 돌아보게 됐죠. ”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은 냉철한 판단력과 리더십을 겸비한 채 무엇이 조국을 위한 길인지 깊이 고민하는 인물이다. 리명운은 조국을 사랑했고, 북한 주민들을 사랑했다. 이성민은 무엇보다 리명운을 연기하며 가장 표현하고 싶었던 점은 그 인물이 김정일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명운이 영화상 김정일의 비선이기는 하지만 동포들에 대한 애정이 그를 버티게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이성민은 그런 리명운을 두고 “리명운이 굉장히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막을 걷고 인간대 인간으로 흑금성을 만났을 땐 본심을 보여줘요. 사실은 조심스럽고 연약한 사람이다“고 설명했다.
“기존 북한 사람들보다 조금 더 사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말을 지도해주던 선생님에게 리명운 같은 사람이 북한에 존재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실제 리명운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어요. 북한이라는 체제가 그래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리명운이라는 사람이 자기 나라 북한을, 그 주민들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이성민은 한마디로 “‘공작’은 우정이다”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에요. 영화 볼 때, 울컥울컥했어요. 첩보 영화이고 쫄깃한 영화 이전에, 저에게는 우정이 많이 각인되어 있는 그런 영화입니다. 그랬기에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남한 사람을 만나 끝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위해 움직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보안관’ ‘바람바람바람’에 이어 ‘공작’ ‘목격자’까지 장르 불문 탄탄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열일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다. 현재는 동물과 소통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를 촬영 중이다.
이성민은 ”제가 등심인 줄 알았는데 연출자분들이 다른 부위를 요구하는 거다. 안심을 꺼내 달라고 할 때 그 순간이 매력적이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비결과 속내를 고백했다.
실제로 연기 경력 30년 중 20년을 무명에 가깝게 산 그는 드라마 ‘골든타임’(2012)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유쾌한 감초 연기를 해왔던 그가 드라마 ‘골든타임’의 최인혁 교수 역할로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 그는 당시 ‘골든타임’과 전혀 다른 컬러의 작품에서 ‘이방’ 캐릭터를 동시에 제안 받았다는 일화도 들려줬다. 그러면서 ‘공작’의 리명운 역시 내 안에 있는 전혀 다른 인물을 연출자에 의해 끄집어냈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배우란 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연출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커요. 드라마 ‘파스타’를 하면서 유쾌한 연기를 하는 배우로 인식됐어요. 한번 어떤 연기를 하면 그 쪽 연기를 많이 요구 받아요. 마치 파생상품처럼요.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다른 부위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요, 전 제가 등심인지 알았는데, 생각하지 못했던 안심을 꺼내달라고 하는거죠. ‘보안관’, ‘바람바람바람’ ,‘공작’, ‘마약왕’ 다 그렇게 다른 부위를 요구해서 좋았어요. 나에겐 안심도 있고 등심도 있고, 또 삽겹살도 있다는 게 좋았어요. 또 다른 부위가 궁금하세요? 그럼 ‘목격자’를 보시면 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낵 같은 연기를 요구하는 ‘미스터 주’를 준비 중입니다. 좋은 재료로 조미료 없이 격식 있게 요리한 고기를 즐기고 싶다면 ‘공작’을 만나시면 됩니다.”
한편, 영화 ‘공작’은 오는 8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