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주요국 정상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뉴저지주 베드민스터에 위치한 골프리조트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프랑스 봄레미모사의 브레강숑 요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일정과 행선지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이달 20일까지 공식업무를 잡지 않은 채 쉬고 있다.
일반인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초호화 별장에서 혈세만 축낸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정상들에게 여름휴가는 머리를 식히면서 차분하게 국정을 구상하는 시간이다. 휴양지에서 보고서를 읽으며 산적한 정치·경제·외교과제와 씨름을 하거나 정재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회동하기도 한다.
서방 정상들의 여름휴가는 제법 길다. 2~3주는 기본이고 한 달 동안 집무실을 비우는 경우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7일, 올해도 지난 2일부터 13일까지 12일 동안 휴가를 보내고 있으며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2주의 휴가를 잡았다. 지난달 29일부터 6일간 휴가를 떠났다가 일시적으로 업무에 복귀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또 2주간 휴가를 간다.
서방국 리더들에 비해 아시아 정상들의 휴가는 짧은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까지 닷새간의 휴가를 마쳤으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4일부터 일주일 동안 열리는 베이다이허 회의에 참석해 휴가를 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열흘 넘게 휴가를 갔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올해는 야마나시현 별장에서 닷새 미만의 짧은 휴식을 취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뉴스를 쏟아내는 주요국 정상들이 집무실을 떠나 어떻게 휴가를 보내는지는 해마다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정상들의 여름나기는 각국의 정치상황이나 각 정상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데 미국 정상들은 휴가기간에 골프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재벌 출신으로 골프 비즈니스가 몸에 밴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 19개 골프장을 보유한 그는 평소 주말은 물론 여름 휴가철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골프클럽을 찾는다. 여름에는 베드민스터의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이, 겨울에는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리조트 인근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클럽이 그의 주요 행선지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전직 미 대통령들도 대표적인 골프 애호가로 휴가 중 종종 필드에 서곤 했다. 이 밖에 아베 총리도 소문난 골프광으로 휴가 때는 어김없이 골프장을 찾는다.
유럽의 여성 지도자들은 명산을 자주 간다. 올해 휴가일정이 묘연한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여름까지 주로 남편과 이탈리아 북부 산악 휴양지 쥐트티롤(남티롤) 줄덴을 방문했다. 특히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까지 9년 연속으로 같은 지역, 같은 4성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고 수년째 똑같은 체크무늬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는 검소한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이킹 마니아’인 메이 총리는 지난해처럼 올해도 이탈리아 북부 휴양지 데센차노 델 가르다(6일)와 스위스 알프스(2주)에서 쉰다.
물론 정상들이 휴가지에서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컨트롤타워인 정상들에게 휴가는 재충전 및 정국 구상의 시기인 동시에 업무의 연장이기도 하다. 작게는 문서 결재, 크게는 정상회담까지 진행한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 집무실로 복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로 영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마크롱 대통령은 3일 자신이 있는 브레강숑 별장으로 메이 영국 총리 부부를 초청해 밀담을 나눴다. 메이 총리는 당초 이탈리아에서 1주일을 머물 예정이었으나 마크롱 대통령과의 회동으로 일정을 하루 줄였다.
여름휴가를 정상의 업적 과시나 이미지 홍보 시간으로 삼는 정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휴가 중이던 7일 보잉·페덱스·마스터카드·펩시코 등 재계 대표들을 모아놓고 “올해 3·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5%를 넘길 것”이라며 투자를 촉구하기도 했다. 통상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던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올해 이례적으로 신도시 ‘네옴(NEOM)’이 들어서는 북서부 사막지대로 떠났다. 후계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야심 차게 발표한 신도시 사업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대표적인 ‘스트롱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휴가 때 웃통을 벗고 낚시를 즐기면서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정상의 휴가는 때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2005년 역대 최악의 허리케인인 카트리나가 닥쳤을 때 휴가일정을 소화했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취임 전 “대통령이 되면 휴가를 가지 않겠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은 ‘휴가’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올해 역시 휴가를 간 것이 아니라 백악관 수리 때문에 거처를 옮긴 것뿐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열린 1차대전 전투 100주년 기념식에 휴가 중이라는 이유로 불참해 빈축을 사고 있다.
미국의 유명 언론인 케네스 월시는 “대통령들은 수년간 백악관에 들어가려 애쓰다가 막상 입성하면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한다”며 대통령들에게 휴가가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