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는 지난 2013년 저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첫머리에서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시작된 밴드 ‘크라잉넛’의 이야기를 적었다. 고등학교 동창 4명과 키보드를 치는 선배 1명으로 완성된 크라잉넛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덕분에 1996년에 데뷔한 후 22년 동안 ‘완전체’로 밴드를 유지하고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대부분 돈 때문에, 때로는 성격이나 음악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밴드가 수시로 해체하고 쪼개지는 굴곡 많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세계에서 크라잉넛은 ‘음악으로 달려보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울고 웃으며 달려왔다.
한국 경제의 언더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벤처 생태계’에서 꿋꿋하게 버텨 마침내 꽃을 피운 김기사컴퍼니의 창업자 박종환(46)·김원태(47)·신명진(43) 공동대표의 창업 이야기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크라잉넛을 떠올릴 수 있다. 부모님부터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친구끼리 동업하다가는 의(義)마저 상한다’며 말렸지만 부산대에서 올라온 창업자 3명은 2000년부터 같은 회사에 들어와 함께 노를 저었다. 제대로 된 길 찾기(내비게이션) 서비스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돈이 없거나 의견이 달라도 나란히 앉아 잡았던 노를 놓지 않고 30대 후반의 나이에 가진 돈을 다 털어 넣어 2010년 ‘록앤올’ 창업에 성공했다. 싸움이 생길 때는 끝까지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의견을 만들었다. 그렇게 5년을 꼬박 사업에 ‘올인’하고서야 ‘김기사(현 카카오(035720)내비)’ 운영사인 록앤올을 대기업(카카오)에 626억원에 매각하며 ‘벤처 성공 스토리’를 처음 완성했다.
록앤올 창업자 3명은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크라잉넛의 데뷔 후 몇 년이 지나 합류한 키보드 치는 선배 ‘김인수’처럼 공간 전문가이자 ‘친한 형’인 김상혁(48) 아라워크앤올 대표까지 함께한다. 박 대표를 통해 김기사컴퍼니와 한국 스타트업 업계 현실 이야기를 경기 판교에 위치한 공유오피스 ‘워크앤올’에서 들어봤다.
록앤올이 카카오에 2015년 성공적으로 인수합병(M&A)된 뒤 박 대표는 외부강연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제2의 김기사가 나오게 해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쳤다. 스타트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 규제로 막거나 대기업이 자본력으로 뺏지 말고 잘 키워내서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자는 뜻에서다. 그럼에도 아직 스타트업 업계에서 록앤올 이후의 또 다른 성공사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창조경제나 혁신성장 등 스타트업을 키우겠다는 정부의 정책기조는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지고 있는데 벤처 생태계는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이유가 뭘까.
이 질문에 박 대표는 “정부가 먹이를 줬다가 뺏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창조경제혁신센터 등 정부가 만든 스타트업 육성 공간에서조차 6개월만 지나면 무료입주 혜택을 끊고 내보내는 식이 대표적이다. 박 대표는 “스타트업이 제대로 성과를 내려면 최소한 수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졸업’이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사무공간마저 뺏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정부의 육성 방식인지 의문”이라며 “이대로는 창업 신화가 나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스타트업과 정보기술(IT) 기업에 불필요한 규제는 ‘영원한 적’이다. 록앤올의 김기사를 녹여낸 카카오모빌리티의 교통 서비스 애플리케이션 ‘카카오T(옛 카카오택시)’가 서울 강남역이나 홍대입구역 등 번화가에서도 확률 100%로 택시를 호출할 수 있는 기능인 ‘스마트호출’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규제로 좌절됐을 때 박 대표는 ‘한국에서는 정말 사업하기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40년 동안 택시운전만 하셨고 지금도 현업에 계세요. 모바일 택시호출 서비스 카카오T가 나오면서 기존 ‘콜 서비스’ 고정 사용료 월 6만원가량이 안 나가고 단말기를 의무적으로 사들이지 않아도 돼 영업하기 너무 편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들이 하는 일과 연관이 있다고 해서 ‘말치레’인 줄 알았는데 정말 수입이 늘었다고 하시더군요. 이 서비스를 사용자와 택시기사가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IT 기업이) 바꾸겠다고 하는데 손발을 다 묶어버리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한국은) 사업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규제로 성장판이 막힌 카카오T를 가까이서 본 그의 솔직한 느낌이다.
박 대표 본인도 록앤올을 공동 창업하고 김기사를 출시했을 때 현실과 맞지 않는 규제 때문에 황당한 일을 수차례 경험했다. 대표적인 것이 김기사 서비스가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에서 2012년 장관상으로 내정됐을 때였다. 국토부에서는 김기사가 상을 받기 위해서는 위치기반 서비스 기술과 관련한 별도의 공식 인증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당시 인증을 받으려고 테스트를 받는데 해당 기관으로부터 ‘실내에서 위치정보가 나오지 않는다’며 기준에 미달한다는 문제 제기가 들어왔다. 게다가 인증을 받으려면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참다못한 록앤올이 “자동차 길 찾기 서비스 기술을 실내 공간에서 인증하라고 요구하면서 비용까지 내라는 것은 무슨 경우냐”며 따지고 나서야 기준이 바뀌었다. 박 대표는 “아무리 기술이나 기계가 고도화해도 정부와 공무원의 ‘업무 페이퍼’가 수십 년 동안 그대로면 어떻게 새로운 산업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박 대표는 스타트업을 ‘공산품’처럼 취급하는 일부 대기업에도 일침을 놓았다. 실제 많은 스타트업은 대기업으로부터 ‘우리가 이쪽 사업을 할 수도 있으니 경영권을 넘기고 합치자’는 협박성(?) 제안을 수시로 받는다. 거절하면 투자 흐름을 막거나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해당 스타트업의 점유율을 빼앗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M&A는 사람으로 보면 부부의 인연을 맺는 셈이잖아요.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누구나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팔려가는 식으로 자신이 키운 사업을 매각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죠. 사실 아직도 몇몇 대기업에서는 스타트업 M&A를 물건 하나 골라 사는 느낌으로 접근하거든요. 기술력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 곳에 스타트업이 더 이끌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닐까요.”
정부와 대기업의 태도가 바뀌어야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스타트업이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 보편적인 구호가 됐다. 그렇다면 정작 주인공인 스타트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박 대표는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무엇이 됐든 (사회현상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스타트업은 사람으로 치면 유아에 불과해 정부나 대기업을 상대로 어른처럼 말을 세련되게 하기 어려워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원만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그래도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만큼 외부에서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카카오에서 카카오T 고도화를 위해 일하다가 올 2월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온 박 대표를 비롯한 3명의 공동 창업자는 김 대표와 ‘아이 같은 스타트업’을 함께 어른으로 육성하는 일에 집중할 예정이다. 국내 대표 IT 기업이 모인 판교에 스타트업을 위한 전용 공유오피스(2개·4000㎡) 워크앤올을 연 것은 새로운 목표의 첫 발걸음이다. 이곳에서 김기사컴퍼니 공동대표 3인이 입주 스타트업에 조언을 하거나 인맥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돕고 유망한 곳에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직접 투자도 할 예정이다. 오는 10월까지는 구체적인 투자 계획과 금액 등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박 대표는 김기사 이상의 스타트업 서비스가 워크앤올에서 탄생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제 록앤올과 김기사는 잊힐 때가 됐어요. 더는 스타트업 M&A의 대표사례로 언급돼서는 곤란합니다. 제2의 김기사를 넘어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든 창업가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워크앤올에서 그런 기업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공동 창업자 모두가 박 대표의 말에 공감의 뜻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송은석기자
■He is
△1972년 부산 △2014년 부산대 컴퓨터공학 석사 △2001~2010년 포인트아이 LBS사업본부장 △2010~2015년 록앤올 공동대표 △2015~2017년 카카오 이사 △2017~2018년 카카오모빌리티 이사 △2018년~ 김기사컴퍼니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