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인 관광객이 도라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는 지금 봐도 도발적이다. 북한군과 몰래 초소에서 초코파이를 나눠 먹고 공기놀이를 하며 우정을 쌓는 남한 병사라니. 이 영화에서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은 자신이 북측 군인들과 몰래 유대를 이어온 사실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의 머리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이렇게 말한다.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우린 적이야.”
친근한 우정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환기한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하고 벌써 18년이 흘렀다. 이미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한 남북 최고 지도자는 이달 중순 세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동포를 싸워 무찔러야 할 적(敵)으로만 바라봤던 질곡의 세월이 막을 내릴지 모른다는 희망의 기운이 싹튼다. 저 멀리서 평화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번주에는 남과 북이 마주 보고 선 채로 민족의 밝은 내일을 꿈꾸고 있는 경기도 파주의 ‘비무장지대(DMZ) 평화관광지’로 떠난다.
‘DMZ 평화관광지’를 찾은 방문객들이 제3땅굴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평화관광의 출발점은 파주시 문산읍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이다. 이 공원 주차장에 가면 한쪽 구석에 ‘DMZ 관광매표소’가 보인다. 임진각에서 출발해 제3땅굴·도라전망대·도라산역·통일촌을 차례로 둘러보려면 반드시 이곳에서 표를 구매해야 한다. 사전 예약은 불가능하고 현장에서만 살 수 있다. 투어는 모두 버스로 진행되며 평일은 9회, 토·일요일은 15회 운행한다. 제3땅굴 인근에서 하차하면 먼저 투어 가이드가 관광객들을 DMZ 영상관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6·25전쟁의 경과를 일별하는 8분가량의 다큐멘터리를 관람한 후 첫 번째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제3땅굴로 이동한다. 북한이 서울 침투를 위한 비밀통로로 팠던 제3땅굴은 지난 1978년 10월 판문점에서 남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됐다. 폭 2m, 높이 2m, 길이 1,635m의 이 땅굴은 규모 면으로 보나 지리적 근접성으로 보나 제1·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인 통로로 평가됐다. 땅굴 진입로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가파른 경사의 갱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느릿느릿한 속도로 약 300m를 내려가니 북쪽을 향해 이어진 땅굴이 훤히 보였다. 바깥의 무더운 공기가 싹 잊힐 만큼 시원한 내부 온도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곳곳에 남아 있는 폭파 흔적을 보면 섬뜩하고 오싹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땅굴은 모노레일을 타고 둘러볼 수도 있고 도보로 구경할 수도 있다. 모노레일 탑승 여부에 따라 ‘DMZ 평화관광’ 티켓의 전체 가격이 달라진다. 성인 기준으로 모노레일을 타면 1만2,200원, 도보는 9,200원이다. 땅굴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다.
도라전망대를 찾은 관광객들이 망원경으로 북녘땅을 바라보고 있다. 다음 코스는 도라전망대. 이곳은 북녘땅을 가장 가까이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망원경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북쪽을 바라보면 하늘 높이 치솟은 전기 송전탑과 가동이 중단된 개성공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뒤편으로는 송악산도 보인다. 전망대에 서서 시원하게 펼쳐진 앞마당에 시선을 고정하면 조금 전 어두컴컴한 땅굴에서 마주했던 서늘한 공포감이 눈 녹듯 사라진다. DMZ 평화관광 상품을 만든 설계자는 참혹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면서 두 손 맞잡고 함께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투어 일정 속에 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라산역을 찾은 방문객이 역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북한 땅의 모습을 대략 살폈으니 이제 통일을 향한 열망을 싣고 멈춰 선 기차가 있는 도라산역(2002년 2월 완공)으로 가볼 차례다.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되기 전만 해도 북측으로 물류를 실어 나르기 위한 화물열차가 오갔지만 지금은 DMZ 평화관광의 루트로만 활용되고 있다. 버스 투어 외에 용산역이나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탄 뒤 도라산역에 하차해 DMZ 관광지를 둘러보는 일정도 가능하다. 용산·서울역에서 도라산역으로 가는 기차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 한 차례만 운행한다. 마지막 일정은 농산물 직판장과 허기를 채울 식당이 있는 통일촌이다. 일정 빠듯한 여행객을 위해 두부김치는 3분 만에 제공되고 시원한 동동주와 함께 콩비지·청국장·해물전골 등 맛난 안주도 한가득 판매한다.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의 철조망에 통일의 열망을 담은 리본이 가득 걸려 있다. /사진제공=경기관광공사 약 2시간 40분에 걸쳐 평화관광지들을 둘러본 뒤 다시 임진각 공원으로 돌아왔다. 투어를 위해 서둘러 버스에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철조망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언제쯤 저 철조망을 허물고 남북이 통일에 다다를지 알 수는 없다. 통일이 당장 우리 경제와 국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영화 ‘강철비(2017년)’에 등장하는 소품 속 문구처럼 원래 하나였던 것은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 한다. 임진각의 철조망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리본들은 이런 염원을 안고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글·사진(파주)=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