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서 외교가 재개되는 등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물꼬가 트일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9일 정권수립일(9·9절) 행사에서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선보이지 않았다. 북한이 전략자산인 ICBM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 미국에 보내는 일종의 ‘수위조절’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AFP통신·교도통신 등 외신들은 이날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ICBM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평양발로 일제히 타진했다. 북한은 이날 행사에서 핵 관련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ICBM을 포함한 탄도미사일 자체를 등장시키지 않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평양에서 9·9절 행사를 취재하는 윌 리플리 CNN 기자는 열병식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 “이전과 다르게 ICBM도 없었고 핵 프로그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references)도 없었다”며 “대략적으로 1만2,000명 이상의 군인과 5만명 이상은 족히 돼보이는 민간인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NK뉴스도 자체 트위터 계정에서 ‘북한판 패트리엇’으로 알려진 지대공 유도미사일 ‘KN-06(번개5호)’과 300㎜ 신형방사포(KN-09), 122㎜ 방사포 등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중거리미사일은 등장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열병식에 ICBM 등 미국을 위협하는 전략무기들이 빠진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시간표’ 언급을 환영하는 등 북미관계에 훈풍이 부는 시점에서 이뤄진 일이어서 주목된다.
다만 김 위원장은 열병식에서 중국 권력서열 3위인 리잔수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주석단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아 올리는 등 북중 친선관계를 과시했다. 북한이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부각한 것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때 주도권을 쥐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APTN이 공개한 열병식 영상에 따르면 김 위원장과 리 상무위원장은 주석단에서 손을 맞잡은 채 들어올리며 열병식을 지켜봤다. 서울경제신문 펠로(자문단)인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김 위원장이 이번 열병식에 ICBM을 가지고 나오지 않음으로써 향후 남북 및 북미 협상에서 북한의 ICBM의 폐기, 해외 반출 문제가 우선적으로 거론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며 “만약 북한의 ICBM이 먼저 내년 여름까지 전량 폐기될 수 있다면 우리 정부는 그 시점에 개성공단을 재가동하고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며 남북 철도·도로연결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