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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인터뷰] 토커→리스너, 박경림이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사진=위드림컴퍼니/사진=위드림컴퍼니



“행사가 끝나면 ‘오늘 만난 사람의 마음을 너무 몰라줬던 게 아닌가’ 고민한다. 덜 웃기는 건 괜찮아도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아프다.”

‘네모 공주’ 박경림이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한때는 걸걸한 목소리로 각종 예능프로그램을 휩쓸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각종 행사장을 주름잡는 ‘명품 MC’가 됐다. 너무 자극적이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그의 유연한 진행 실력에 많은 스타와 관객들이 웃음 짓는다. ‘마이크를 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 하나로 열심히 달려온 박경림의 지금은 여전히 뜨겁다.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내가 특별히 잘해서 20년을 맞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대선배님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하지만 20년 동안 그렇게 원했던 마이크 잡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그가 처음으로 방송 활동을 하게 된 1988년으로 돌아가봤다. 자신감과 패기로 똘똘 뭉쳤던 당시 우연히 참가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그에게 방송 활동의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고등학생 때 ‘이본의 불륨을 높여요’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가 우연히 장기자랑 진행을 맡게 됐는데 그때 방송을 ‘별이 빛나는 밤에’ 작가 언니가 듣게 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에도 출연하게 됐다. 그때도 겨울방학 특집으로 잠깐 출연했다가 ‘두시의 데이트’ 이문세 오빠께서 기회를 주셔서 ‘박경림의 그는 누구인가’ 코너를 10분 동안 맡게 됐다. 그게 저의 정식 방송 데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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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프로그램을 통해 점점 꿈을 향해 가까워져간 그는 1999년 국내 최초로 ‘토크 콘서트’를 시도하며 ‘토커’로서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노래도 춤도 아닌 ‘말’이 전부인 콘서트에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박경림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박경림이 가진 말의 힘은 콘서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예전에 양파 콘서트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양파가 노래를 하는 모습이 마치 관객들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선율과 멜로디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되면서 소통을 하더라. 그걸 보면서 ‘나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토크 콘서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누가 말하는 걸 돈 내고 보냐’면서 말렸다. 하지만 일단 후회를 해도 해보고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로에서 토크콘서트를 열게 되고 감사하게도 너무 잘 됐다.”

첫 시도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2014년부터 3년 연속 ‘박경림 토크 콘서트’를 개최해 매진 열풍을 이끌어냈다. 이번 ‘리슨 콘서트’ 역시 이전의 공연들과 맥락을 같이 하지만 ‘토크’가 아닌 ‘리슨’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움울 추구했다. 박경림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 관객들이 박경림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이번 콘서트의 취지다.


“지난 20년 동안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앞으로의 20년에는 좋은 리스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결국 내가 말을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이다. 말이 많다고 해서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말을 잘 한다는 건 한 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오롯이 집중해서 딱 맞는 말을 해주는 거다. 그러려면 편견 없이 그 사람이 말하는 그대로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이 뒤에 내가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를 신경썼지만 정말 듣는 것에만 집중하면 이 사람이 진짜 말하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리슨 콘서트’를 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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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데에는 결혼 생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결혼·출산과 동시에 일보다는 가족이 우선시 되고, 점점 자신의 꿈과 멀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박경림은 힘든 시기를 보냈다.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할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을 겪으면서 그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할 3~40대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계획대로 되는 일도 없고, 말 못할 고민들이 많았다. 일도 단절되고 육아는 어렵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오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때 ‘나만 이런 게 아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 힘듦을 함께 만나서 나누면 위로가 될 거라 생각했다. 정말 힘들고 내 얘기를 하고 싶지만 누구한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살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나도 결혼, 육아를 거치며 그걸 경험했고 ‘그런 사람이 내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박경림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비단 여성 뿐만이 아니다.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을 좋아한다. 오래 만난 지인이든, 처음 만난 사람이든 박경림은 사람과의 대화와 교류를 즐긴다. 사람을 향한 애정과 관심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밝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나는 사람이 정말 좋다. 우리 대표님은 ‘앞으로 더 큰 진행자가 되려면 냉철해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상대의 안 좋은 점이 안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단점을 보는데 나까지 봐야 하나 싶다. 물론 내가 더 폭넓은 사람이 못될 수는 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게 좋고 다들 잘 됐으면 좋겠다. 가끔 누군가를 만날 때 주변에서 ‘그 사람 되게 무서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오히려 너무 순수해서 본인을 보호하려고 강하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경우를 보면 ‘내가 또 속단할 뻔 했구나’ 반성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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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역시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방송 활동을 시작하면서 누군가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상처를 극복하게 해준 것 조차 사람이었다.

“어릴 때 그런 순간이 있었다. 마냥 방송 나오는 게 신기하고 사람들이 알아봐주는 게 행복할 때였다. 분명히 내 앞에서는 ‘너무 좋아. 잘했어’라고 칭찬해주던 사람이 화장실에서 욕을 하고 있더라.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고 그런 일들이 몇 번 반복되니까 무섭더라. 그런데 그때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둔 것 역시 사람들이었다.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그걸 극복하게 해주는 것도 사람이더라.”

20년을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앞으로의 20년을 준비해야 한다”며 더 가열 차게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한때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가 되고 싶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던 그가 지금 그리는 꿈은 뭘까.

“그때는 오프라 윈프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토크쇼 하는 게 멋있어 보여서 그렇게 얘기했다. 지금은 창피해서 밤에 이불을 찬다. (웃음) 그냥 박경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잘 살고 싶다. 누군가가 ‘박경림처럼 되고싶어요’라고 말하는 걸 들을 만큼, 지금까지 많이 부족했던 것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

김다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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