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약삼단’
1887년 9월,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 조선에 주미공사 파견을 승인하면서 내건 조건이다.
내용은 세 가지. 조선공사는 주재국(미국)에 도착하면 청국 공사관에 보고한 뒤 청국공사를 경유해 주재국 외무부에 가야 하며 공식행사에서 조선공사는 청국공사 다음에 앉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청국공사와 미리 상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1637년 병자호란 후 250년간 이어져온 조선의 서글픈 현실이었다.
닷새 전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승인’ 발언은 19세기 조선을 떠올리게 한다. 5·24조치 해제 검토와 관련해 트럼프는 “한국은 미국의 승인(approval) 없이 그것(제재 해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명백한 주권 침해다.
동시에 트럼프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또렷이 보여줬다. 세계 제1의 국가는 미국이며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의 키(key)는 미국이 쥐고 있음을. 21세기에도 한민족의 운명은 외부 변수에 달려 있음을….
물론 대한민국의 국력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5,308억달러로 세계 12위다. 그런데 국력은 상대적이다. 주변 4강 가운데 미중일이 1~3위다. 지난해에는 러시아가 11위로 우리를 제쳤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손 놓고 있자는 얘기가 아니다.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는 “병력이 많다는 것만으로 어떻게 승패가 결정되겠는가”라고 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규칙과 장단점을 알아내 공략하면 승산이 있다는 뜻이다. 한반도 운전자도 국력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변국보다 두 수, 세 수를 더 내다봐야 한다. 그리고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 트럼프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일 수 있어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여당 대표의 질문에 취해 5·24조치 해제를 “관계부처와 검토하고 있다”고 해 논란을 일으킨 외교부 장관이나 “깰 각오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임했다(사실 한미FTA를 깨려고 한 건 트럼프다). 꿀릴 것 없는 협상이었다”는 통상교섭본부장의 허세가 걱정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죽기 1년 전, 친일파 이완용은 세상에서 제일 처신하기 힘든 일 세 가지로 ‘쇠약한 나라의 재상과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를 들었다(상황적 어려움이 매국을 정당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기변명에 불과한 이 말에도 교훈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에서 장관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남다른 애국심에 다른 나라보다 높은 전문성과 단단한 논리로 중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수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고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 우리 외교·통상 장관들은 이 기준에 맞는가. 인사권자는 대통령이지만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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