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유럽 순방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대북 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주력할 것임을 예고했다. 대북 제재 완화에 단호한 미국과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한 뒤 다시 미국을 움직이는 ‘우회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첫 발걸음부터 유럽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됐다. 미국에 이어 첫 순방지인 프랑스 역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언급하며 깐깐한 입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양국은 이번 공동선언문에 ‘CVID’가 포함되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까지 심도 있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예민한 표현이라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오는 11월 말~12월 초에 남북 철도·도로 착공식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모든 나라가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대한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쳐 한미공조를 둘러싼 잡음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한·프랑스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한편으로 북한이 핵을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핵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믿음을 국제사회가 줘가면서 빠르게 비핵화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 단계마다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 등의 ‘당근’이 주어져야 비핵화에도 속도가 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결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무엇보다 평양의 구체적인 공약을 기대하고 있다. 비핵화와 미사일 계획을 폐지하기 위한 프로세스에 실질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실제적인 의지를 보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엔진실험장을 폐기한 데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조치를 했지만 국제사회가 인정해주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다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보다 실질적인 조치가 나와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때까지는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제재를 계속해야 할 것”이라며 “프랑스는 전 세계적인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 상임이사국으로서 CVID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 부부는 문 대통령 내외를 엘리제궁 관저까지 안내하는 등 크게 환대했지만 대북 제재 문제에서만큼은 단호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을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지금 당장 맺을 계획은 없다”며 “탄도미사일, 비핵화, 인권보호,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평가가 실질적으로 이뤄져야 가능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계기로 영국·독일·태국과 각각 정상회담을 가진다. 특히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문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라도 일정한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확보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 국무부는 남북이 15일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을 11월 말~12월 초에 진행하기로 합의한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밝힌 대로 남북의 관계 개선 문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연결하는 것과 별개로 진전될 수 없다”고 밝혔다.
/파리=윤홍우기자 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