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카슈끄지, 한 언론인의 죽음 뒤 가려진 외교 '거래'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종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AP연합뉴스사우디아라비아의 실종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AP연합뉴스



미국에서 활동하던 사우디아라비아 반(反)정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이후 실종됐다. 그가 모습을 감춘 지 15일 후, 사건의 끔찍한 정황이 언론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터키 정부는 사우디 왕실의 지시를 받은 요원들이 카슈끄지를 무참히 살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우디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카슈끄지 암살 사건 진상을 두고 전 세계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이목을 끌었던 건 미국 정부의 대응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죄 입증 전까지는 유죄’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사우디 정부의 유죄를 단정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사우디 정부를 일방적으로 감싸기만 했던 입장은 지난 18일 선회했다. 그간 카슈끄지 실종·암살 의혹에 어정쩡한 자세를 보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 의혹이 불거진 이후 처음으로 그의 사망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카슈끄지가 죽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분명히 그런 것 같아 보인다. 매우 슬픈 일”이라고 답했다. 전 세계 주요 언론이 카슈끄지 사태를 다루며 파장이 커지고 있고,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측근 연루설도 잇따라 불거지면서 더 이상 사우디를 두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가피하게 사망을 인정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에 대한 앞으로의 대응 방침을 묻자 “매우 가혹(very severe)할 것”이라면서도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며 진상규명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사우디에 대한 지지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블룸버그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블룸버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블룸버그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블룸버그


카슈끄지의 처참한 죽음과 사우디 왕실과의 연계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사우디에 온전히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속에는 미국과 사우디 간의 복잡한 외교 셈법이 내포돼 있다. 칼럼니스트 폴 월드먼은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에서 “왜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를 그렇게도 좋아할까. 그들이 돈을 지불하기 때문”이라며 대통령 개인의 이해 관계로 인해 미국의 외교정책이 좌지우지되는 우려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CBS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과 사우디 왕실 간의 첫 거래는 지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산 위기에 놓인 트럼프 대통령은 급하게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요트를 매물로 내놓았다. 사우디의 억만장자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이를 2,000만달러에 구매, 트럼프를 도우며 양측의 관계가 시작됐다. 빈 탈랄 왕자는 1995년에도 재정적자를 기록하던 트럼프 소유의 플라자 호텔을 구매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사우디 왕실이 뉴욕 ‘트럼프 타워’의 45층 전체를 1,200만달러에 사들였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그와 사우디의 사업 관계가 더욱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에도 사우디 로비스트들은 트럼프 소유의 호텔을 이용하는 데 27만 달러를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와의 개인적 금전 거래 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내가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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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동 지역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는 핵심 동맹국인 사우디의 협조가 필요한데, 이번 일로 사우디와 관계 악화를 우려하는 미국 정부가 이 사안을 두고 정면으로 맞서기를 주저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유가 문제가 가장 큰 핵심이다. 다음 달 5일부로 미국이 이란의 원유 수출을 봉쇄하는 제재 조치를 부활하는데, 국제 유가 안정을 위해서는 사우디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봉쇄하더라도 국제유가가 급상승하지 않도록 사우디가 원유 생산량을 조절하는 방안을 사우디와 협의해왔는데, 이번 사건으로 이 같은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해석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사우디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미국의 압박을 받으면 원유와 미국 채권, 이란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함께 세계 최대의 산유국일 뿐 아니라 2016년 기준 1,170억 달러(약 131조8,000억원) 규모의 미국 채권을 보유한 국가다. 미국 채권 보유국 상위 12위 안에 들어 있는 만큼, 사우디가 유사시 미국 국채를 처분하면 미국 경제에도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다. 지난해 사우디와 체결한 1,150억달러(약 130조원) 규모의 무기 거래 계약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사우디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남긴 한 언론인의 죽음이 결국 ‘꼬리 자르기’로 봉합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우디와 미국 간의 이 같은 외교적 ‘거래’ 때문이다.

주요 외신들은 결국 미국과 사우디가 사우디 왕실의 책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합의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카슈끄지의 암살은 인정하지만, 사우디 정보요원들이 빈 살만 등 왕실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저질렀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거라는 해석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15일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과 통화한 뒤 “범인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살인자(rogue killers)일 수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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