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결국 ‘숫자의 함정’에 빠졌다

비정규직 ‘0’에 함몰 속도전 부작용

최저임금 ‘1만원’도 경제환경 무시

과거정권도 숫자 앞세우다 결국 탈나

수치 보다 진정 ‘사람’ 위한 정책 펴야




서울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의 채용비리 파장이 만만치 않다. 공사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108명의 친인척을 채용하는 ‘고용세습’ 특혜가 있었다는 것이 요지다. 최악의 취업난 속에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 입성에 목을 매는 공시생은 물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100만 실업자들로서는 더욱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5월 출범하자마자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0)’를 외쳤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단계로 이미 853곳의 15만4,000여명이 전환 결정됐다. 600여곳 1만5,974명이 현재 전환을 추진 중이고 민간 위탁기관의 경우도 실태 조사를 거쳐 정규직 전환 인원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 전환 1,285명 가운데 108명에게서 문제가 있었다면 전체 공공 부문 비정규직이 41만6,000명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문제의 취업자들은 훨씬 많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번 국감에서 유치원 비리로 여권에 선공을 빼앗긴 야권이 취업 특혜건에 정치적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화해 고용을 안정시키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속도와 안전장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과속을 하면 그 진의는 빛을 잃고 무서운 결과마저 낳을 수 있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만들겠다는 구호에만 얽매여 지난해 16.4%나 올리고 올해도 10.9%를 인상했다. 왜 이만큼 올려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 타당성보다 2020년까지 ‘1만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인상이 필요하다는 것뿐이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고통받고 고용이 크게 악화하자 이제야 정부에서도 속도 조절론이 슬금슬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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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냉정히 돌아보지 않고 ‘제로(0)’와 ‘1만원’이라는 숫자에만 함몰된 것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가 취임 초기 4%에 불과한 에너지 자주개발률을 ‘25%’로 끌어올리는 것에 얽매여 해외 석유·석탄·가스 광구를 마구잡이로 사들여 결국 수십조원의 혈세를 낭비한 해외 자원개발 사건도 결국 숫자가 부른 재앙이었다. 박근혜 정부 역시 공기업 부채율(중앙 180%, 지방 120%)을 앞세우다 보니 공공기관들이 알짜 재산을 서둘러 팔아 결국 혈세를 낭비한 것 역시 ‘숫자의 함정’에 빠진 결과였다.

대통령이 ‘숫자’를 앞세운 순간 모든 정부부처와 공무원들은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목표를 향해서만 돌진한다. 옆이나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정해진 기간 안에 하달된 숫자를 채워야 한다.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방지턱도 없는 도로를 고속으로 질주하는 것이다. 이번 공기업 채용비리 사건에서도 애초 불공정 채용을 우려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현 정부의 임기인 2022년까지 공공 부문 비정규직 ‘0’를 완성해야 하고 또 2020년에는 최저임금도 1만원까지 올려야 하는 것이 국가의 지상과제가 된 상황이다. 경제상황이나 기업의 현실은 목표 달성, 그 다음 문제일 뿐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현 정부가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보다 오히려 ‘숫자’가 앞서는 꼴이다. 청와대와 여권이 그렇게 터부시하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나 유효했던 ‘나를 따르라’ 식의 산업개발 독재정책이 요즘 노동 분야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 아닌지 곱씹어봐야 한다.

리더가 목표를 정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방향이 돼야지 수치 그 자체가 돼서는 안 된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수정할 수 있는 것이 결국 민주주의이고 좋은 리더의 또 다른 덕목이다. 바꾸지 못하는 것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독재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옛날 나그네에게 우물물 한 바가지를 떠 주더라도 버들잎을 띄워준 것은 물도 급히 먹으면 체할 수 있음을 우려한 ‘사람 사랑’의 마음이다. 정부와 청와대는 진정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 아니면 숫자를 위한 정책에 빠져 있는지 돌이켜봐야 할 때다. /hanul@sedaily.com

한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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