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과 오대산에 이어 북한산까지 절정의 단풍이 내려앉았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서울 도심의 고궁들도 알록달록 물들었다. 샛노랗게 낯빛 바꾼 은행나무 뒤로 붉은 이파리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아직도 ‘버틴’ 초록 잎사귀들도 있으니 꼭 이 그림을 닮았다. 곽인식(1919~1988)의 ‘작품 83-B’이다. 봄에 봤더라면 분명 꽃잎 떨어져 내린 모습 같다 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고운 빛깔 단풍색이다. 한 잎, 또 한 잎 색을 바꾸는 나무처럼 화가도 하나씩 원을 찍었으리라. 이 고운 가을을 조금만, 조금만 더 오래 붙들고픈 마음은 로시니(1792~1868)의 ‘F장조 변주곡의 안단테’의 선율을 그려간다. 로시니의 낭만파 감수성은 순수하고 맑게 한 음 한 음을 고이 연주하되, 절대 서두르지 말라며 안단테(Andante)를 주문했다. 청아한 가을의 하늘과 바람을 음미하며 느리게, 느리게. 그렇게 한잎 씩 물들어가는 단풍의 느낌을 전하지만 현실의 가을은 비발디 ‘사계(四季)’의 ‘가을’처럼, 그 중에서도 3악장처럼 씩씩하게 뒤돌아보지 않고 야속하게 떠나리라.
곽인식의 그림 속 동글동글한 타원형은 엄지손가락 지문처럼 각각의 정체성을 갖고 생글거린다. 길이 170㎝에 폭 96㎝의 캔버스 3개를 합쳐놓은 대형 작품 위로 낙엽처럼 쌓여 이리저리 겹쳐진 색점이 번지는 맛에 우연의 멋을 더했으니 환상의 세계를 이룬다. 이따금 흔들리는 단풍잎이 가을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 투명하게 보일 때가 있는데, 이 점들이 그렇다. 색과 색이 겹치면 더 진하고 어두워지기 마련이건만, 곽인식의 색점은 빛인 양 겹칠수록 더 밝아진다. 경쾌하고 투명한 노랑, 주황, 빨강의 동그라미들은 무중력 상태로 떠다니는 듯, 우주 속에 존재하는 만물의 이야기를 재잘거린다.
곽인식은 일본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파 중 하나인 ‘모노하(物派·물파 또는 모노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모노하 이론을 정립한 화가 이우환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된다. 백남준 못지않게 선구적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이름조차 낯설 정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곽인식은 1919년 4월 18일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YMCA 중등부를 수료한 후 1937년에 형과 삼촌이 있던 일본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건너갔다. 그는 도쿄에 있던 ‘일본미술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자료가 희박해 그의 학창시절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1938년 방학 중에 귀국해 첫 결혼을 했고 아들도 두었으나 이내 아들을 잃고 부인과도 헤어졌다. 이후 1946년에 두 번 째 결혼을 하고 유일한 유족인 아들 곽경직을 얻었지만 1949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 1982년 돌아오기 전까지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았다. 일찍 헤어져 ‘아버지’ 한 번 못 불러본 아들은 서른을 넘기고서야 처음 일본에서 부자상봉을 했다 한다. 곽인식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이해를 얻지 못했고 당시 집안에서 좌우익 갈등이 벌어져 곤란한 상황이었다는 등 복합적이다. 그 시절이 그랬을 것이다. 한반도 전체가 좌우익 대결이 첨예하던 때였으니 그것이 꼭 그 집안 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테고, 시대를 앞서 간 예술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너른 이해를 얻기 어려우니 말이다.
곽인식의 첫 개인전은 유학에서 돌아온 1942년 대구 ‘삼중당’에서 열렸다. 일본으로 떠난 곽인식은 세 번째 부인이자 평생의 반려자가 된 일본인 발레리나 오마타 사토코를 만나면서 새 인생을 살았다. 그 시기 작품들은 앞서 본 ‘작품 83-B’ 같은 후기 회화와는 사뭇 다르다. 전통미술이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현대미술의 새 장이 열리려 하는 격변기에는 전위적인, 그러니까 아방가르드 미술이 그 선두에 나서는데 곽인식이 그 선봉장이었다. 1950년대 그의 화풍을 강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의 분석을 빌려 말하자면 “피카소와 미로를 혼합시킨 듯”한 “초현실주의적인 심상(心想) 풍경화”라 할 수 있다. 1961년에는 강렬한 모노크롬(monochrome) 작품을 선보였다. 모노크롬은 한가지 색조로 이뤄진 작품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를 곽인식의 영향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작업에 대한 열정이 왕성했던 곽인식은 형태없이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던 앵포르멜, 캔버스를 찢은 작품으로 유명한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주의, 푸른색 만으로 온갖 시도를 다 했던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 형태를 해체한 다음 다시 쌓은 아르망 등의 작품을 두루 접했다.
독보적인 작품으로 ‘유리깨기’가 있다. 거리를 걷다가 1960년대 당시로는 보기 드문 큰 빌딩의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너무 커서 눈에 다 들어오지 않기에 크면 클수록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존재”인 ‘유리의 투명성’에 매료됐다. 그리하여 깨뜨린 유리조각을 덕지덕지 캔버스에 붙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리작업으로 단색조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유리 크기 만큼 땅을 파서 그 위에 유리를 놓고 쇠구슬을 떨어뜨려 깬 다음, 판넬 위에 천을 깔고 그 위에 깨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시 붙인 작품들이다. 당시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곽인식 뿐이었다. 물체에 손을 거의 대지 않고 그 존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물체와 공간 혹은 물체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 것이 그로부터 10년 뒤쯤 등장한 모노하다. 역설적이게도 곽인식은 자신보다 뒤늦게 등장한 모노하와 후배작가 이우환의 이론과 활약을 통해 재조명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두로 캔버스를 태우거나 동판을 찢어서 철사로 꿰매고, 망치로 두드려 찌그려 트리는 등의 행위를 통해 물질의 속성을 드러냈다. 그런 1950~60년대 작품들은 길었던 일제 식민시대와 해방 후의 가혹한 시기를 겪은 작가의 체험을 반영한다. 미술평론가 조셉 러브가 “쪼개져 있는 현실(reality)을 하나로 봉합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했듯 물질을 찢고 다시 봉합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였다. 평범하기 그지없어 발로 차버릴지도 모를 돌멩이에 쌀알 같은 흰 점을 찍은 작품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조각장에서는 15m 높이 원기둥으로 돌을 쌓아올린 ‘작품 86-끝없는’을 만날 수 있다. 돌을 쌓아올리며 소원을 빌던 옛사람의 손길이 생각나지만, 작가는 가공하지 않은 돌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했다.
“우주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질이 존재하고 있다. 그 많은 물질마다 말을 하게 해서 무수한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면…물질이 뱉는 말은, 반드시 새로운 차원을 낳게 될 것이다.…나는 일체의 표현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하는 말을 들으려 하는 것이다.”
한·일 현대미술교류사 연구를 위해 ‘곽인식 론(論)’을 쓴 강태희 교수는 이 말이 ‘구타이 미술은 물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물질은 그들의 내재적 특성을 진정으로 노출하면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하며 울음까지 운다’고 한 ‘구타이 선언문’과 아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구타이’는 영어로 ‘구현(embodiment)’을 뜻하며 “모방이 아닌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을 창조하자”고 일본의 1950년대 미술운동이다. 20세기 한국과 일본미술의 교류에서 곽인식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거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고, 저평가가 안타까운 대목이다.
작가는 1970년대 후반부터 회화에 집중한다. 일찍이 원(圓)에 심취해 종이에 덩그러니 원 하나만 그린 ‘사물과 사물’, 놋쇠와 합판으로 제작한 원형의 ‘천(성)’ 등을 만들었던 그가 한지에 타원형의 색점을 찍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1982년 갤러리현대에서 귀국 후 첫 개인전이, 198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화가가 폐암으로 별세한 지 3년 후 발레리나였던 일본인 부인은 남편의 뒤를 따랐다. 자식없이 혼자였기에 사후에 발견됐다. 작가의 유일한 혈육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준(1937~2011)이 곽인식을 위해 설계한 방배동의 옛 아틀리에를 지키고 있다.
“점은 점을 부르고, 점이 겹쳐지고 점을 찍는 것에서 초월한다.”
겹치며 찍힌 점들이 어깨 부대끼며 사는 우리네 현실과 닮았지만 그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빗물에 떨어져 바닥을 나뒹구는 낙엽마저도 고귀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