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30대 피해자 부부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재판을 다시 하라고 주문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피해자 진술을 배척한 원심 판단은 잘못이라는 결정이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강간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모씨의 상고심에서 성폭행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대전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고 31일 밝혔다.
충남 논산의 조직폭력배인 박씨는 지난해 4월 친구가 해외 출장을 간 사이 친구의 아내인 A씨를 한 모텔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A씨에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과 자녀를 해칠 것이라고 협박했다. 박씨는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조직폭력배 후배들의 뺨을 때리는 등 폭행한 혐의도 받았다.
1심은 폭행 혐의 등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성폭행 혐의는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이에 A씨 부부는 올 3월 전북 무주의 한 캠핑장에서 함께 목숨을 끊었다. 당시 유서에는 박씨를 향해 ‘친구의 아내를 탐하려고 모사를 꾸민 당신의 비열하고 추악함’, ‘죽어서도 끝까지 복수하겠다’는 내용을 남겼다. 피해자의 추가 증언이 없이 치러진 2심도 1심 판단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이 A씨의 진술 신빙성을 무시했다며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며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인정됨에도 원심은 무죄로 잘못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특정 개념이 특정 성에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은지, 성역할 고정관념이 개입되지는 않았는지 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