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파도가 검은 돌을 때리고 간다. 진초록 보리밭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호젓하고 평화로운 제주의 섬 가파도가 서울의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용산구 이태원로에 위치한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가파도 프로젝트’ 전시가 1일 개막했다.
스토리지 지하 2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바람과 파도소리에 귀가 먼저 열리고 별스러울 것 없는 자연 풍경에 눈이 뜨인다. 또 다른 쪽 벽면에는 정소영 작가의 17점 연작 ‘섬 연구 드로잉’이 걸려있다. 색감이나 형태가 정겨우면서도 신비로운 풍경을 이뤄 마치 여행과 삶이 공존하는 섬의 분위기를 함축한 듯하다. 정소영은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가파도 AiR)’에 머무르며 작업했다. 그는 섬의 지형과 바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이와 관련된 조각, 설치작업을 준비했다. 바다의 무게와 긴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부표·로프 등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한때 바다의 경계를 구분 짓던 표식물들이 멀리 가파도까지 떠내려와 바위에 엉키거나 돌의 일부처럼 보이는 모습”을 본 작가는 “파도를 타고 일렁이는 것이 마치 생물이 바다 표면에 흔들리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같다”며 그림을 그렸다.
같은 시기의 입주작가 양아치는 잔잔한 수면 아래, 바위틈에 사는 바다 생물들, 어선을 따라 물살 가르는 파도 등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았다. 작가는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외딴 섬에서의 생활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지만 가파도 고유의 풍요로운 파도의 빛, 색, 선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가파도는 제주도 남서쪽 서귀포 모슬포와 최남단 섬 마라도 사이에 자리 잡은 가오리 모양의 납작한 섬이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부인인 정명이 현대카드 브랜드 부문장이 이 아름다운 섬을 눈여겨본 것은 6년 전 일이다. 가파도에 활력을 더하면서도 우도와 마라도가 겪은 관광지 난개발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번 전시는 ‘가파도 프로젝트’가 전개된 지난 6년과 그로 인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지난 2012년 현대카드와 제주특별자치도청이 △가파도 자연 생태계의 회복과 유지 △자립적 경제시스템 구축 △지역과 문화의 공존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최욱 원오원 아키텍츠 대표가 힘을 보탰다. “27만 평인 가파도 전체가 골프장 하나 크기이고, 골프장 18홀은 사람이 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을 염두에 둔 최 대표 눈에 부도가 나 버려진 콘도 건설현장이 띄었다. 건물을 높이 올리기 위해 터를 파 둔 자리에는 수년간 물이 차 있었다. “지하구조물을 이용하면 평지 섬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마을도 모슬포도 다 보이는 이곳을 아티스트 레지덴셜 프로그램으로 이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도소리가 아닌 대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장소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가 있죠.”
이곳 ‘가파도 Air’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과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영국 테이트미술관이 자문했고 현대카드는 오는 2020년까지 운영지원을 약속했다. 입주작가였던 자넷 루이는 “미국이나 유럽 여러 곳에서 레지던시 경험이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가파도가 처음이었고 여기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한국문화를 시골문화까지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면서 “뇌를 섬이라 놓고 인간의 내적 정신을 묘사하려는 실험적 단편영화를 작업하는 중이었는데 여기는 ‘진짜 섬’이었다”고 밝혔다.
전시장에서 1/100로 축소된 가파도 모형, 1/5로 제작된 가파도Air 모형을 볼 수 있다. 지하 3층은 초대형 영상작품들로 가득 차 도심 속 섬을 경험하는 명상의 장소로 제격이다. “가파도라는 장소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곧 한국의 미래가치를 만드는 것”이라고 최 대표가 덧붙였다. 전시는 내년 2월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