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저기 청와대도 보이네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의 서울경제신문 본사를 찾은 프로골퍼 박결(22·삼일제약). 그는 본사 14층에 위치한 카페 ‘송현’에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진 경복궁의 가을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청와대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 소리쳤다. “저기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요. 아시안게임 끝나고 초청받아서.”
박결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여자골프 개인전 금메달리스트다. 분명 영광스러운 이력이지만 어쩌면 거기까지가 정점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드순위전 수석 합격의 화려한 경력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한 박결은 4년간 우승 없이 준우승만 6번 했다. ‘올해도 틀렸나’ 싶을 때 첫 승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지난달 28일 제주 핀크스 골프클럽에서 끝난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 메이저대회 수준의 우승상금(1억6,000만원)이 걸린 이 대회에서 박결은 선두와 8타 차의 열세를 뒤집고 우승했다. 그는 “골프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으면 항상 아시안게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프로 데뷔 첫 우승을 한 날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사실 4년이라는 시간을 한풀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다. 그럼에도 우승이 확정됐을 때 박결이 쏟아낸 눈물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골프의 자존심을 지켜냈고 그 어렵다는 시드전도 1위로 통과했다. 여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춰 일찌감치 스타 선수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기대에 비해 성적이 나지 않자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골프 말고 화장과 옷차림 등 다른 것에만 신경 쓴다’ ‘1승도 못하는데 기사만 많이 나온다’ 등의 얘기들이었다. 박결은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는 신인 때 화장도 하지 않고 경기에 나갔다. 그러자 화장은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들렸다. 화장을 하고 나가자 또 다른 비판이 따라온 것이다. 경기복은 보통 선수를 후원하는 의류업체에서 지정해준다. 박결은 그 흔한 인스타그램도 안 한다. 또 인터뷰 기사의 대상은 보통 잘하는 선수와 잘할 것 같은 선수인데, 잠재력과 상품성을 동시에 갖춘 박결은 인터뷰할 가치가 높은 선수로 분류된다. 그는 “매년 비시즌 계획은 드라이버샷 거리 늘리는 것과 쇼트게임 완성도 높이는 것, 새 시즌 목표는 첫 승을 하는 것이라는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면서 미안함이 컸고 지치기도 했다”면서 “1승도 못했는데 기사만 많이 나온다는 댓글이 가슴 아팠다. 이제 1승도 했으니 기사가 나와도 당당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박결은 매번 똑같은 새 시즌 목표를 밝혀야 했던 이전 인터뷰 때보다 확실히 밝아졌다. 표정과 자세에서부터 느껴졌고 간간이 농담도 먼저 던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연예인들이 왜 힘든지도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 말했다. “루키 때는 주변에서 ‘무조건 우승 나온다’ ‘2승도 가능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너무 많이 받다가 점점 기대하시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관심이 차갑게 식더라고요. 당연한 얘기지만 ‘무조건 실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니 3년차쯤 되니까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좀 내려놓을 수 있게 됐어요. 시즌이 끝나면 60명만 지옥의 시드전을 피할 수 있는 치열한 환경이잖아요. 그 속에서 나는 적어도 20~30위는 매년 유지하고 있으니 행복한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2학년 때 골프를 시작한 박결은 마냥 재미있게 골프를 쳤다. “어릴 때부터 새벽반으로 수영도 배우고 등산도 정말 많이 했어요. 아빠는 쉬는 것을 못 보는 스타일이어서 어떻게든 운동하게 하셨거든요. 시험 전날이든 피곤한 날이든 하루의 마무리는 꼭 줄넘기 5,000개였어요. 다른 운동을 할 때보다 골프 연습장이나 필드에 나가 있을 때가 가장 재미있더라고요.”
박결은 주니어 시절을 돌아보며 “정말 딱 무난한 선수였다. 그럭저럭 흘러와서 그런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90대 스코어를 냈고 이후 우승도 꽤 해봤지만 전국 단위 대회 우승은 얼마 없었다. “아빠와 중학교 때부터 이런 목표를 세웠어요. KLPGA 정회원 테스트가 어려우니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테스트 면제를 받자. 그런데 정말 고2 때 잘해서 고3 때 선발전 자격을 얻고 그걸 또 1등으로 통과한 거예요. 아시안게임은 대표팀에 워낙 잘 치는 친구들(최혜진·이소영)이 많으니 단체전만 생각하고 나간 건데 어떻게 하다 보니 개인전 금메달까지 따고요. 대표팀 동료들에게는 ‘나는 서포트만 잘할 테니까 같이 단체전 잘해보자’는 얘기만 했었거든요.” 박결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빼어나게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주목받게 되면서 어색하고 힘들었던 것도 같다”고 돌아봤다.
힘든 내색을 하는 법이 없던 박결은 올 9월 초쯤 처음으로 “이대로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을 했다. 꾸준함 하나로 버텨왔던 투어 생활인데 시즌 초의 등 부상을 극복한 올 시즌은 기복이 너무 심했다. 2등을 했다가 바로 다음 대회에서 컷 탈락을 하기도 했다. 9월 한화 클래식 때는 첫날 잘 쳐놓고 둘째 날 망쳐서 1타 차로 컷 탈락했다.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1시간 가까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박결은 “무난하게 4년을 보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회가 끝나니 온갖 불안감이 한꺼번에 닥쳤다. ‘또 컷 탈락하면 어떡하나’부터 ‘이러다 후원사 계약도 다 떨어져나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해법은 따로 없었다. 질끈 눈 감고 다시 시작하는 것. 박결은 “‘시즌을 일찍 접고 내년을 준비하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도 심각하게 했었는데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웃어 보였다.
첫 우승을 한 그날 저녁은 “안 먹어도 배가 불러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박결은 너무 좋아 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수백 통의 축하 문자를 받으면서 ‘만년 기대주가 아닌 우승자가 진짜 됐구나’ 하고 실감하게 됐다고. 첫 승은 이왕이면 역전 우승이면 좋겠다는 바람을 역대 최다 타수 차 역전 우승으로 이뤄낸 박결. 그는 2승째는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느냐는 물음에 “마지막 날 챔피언 조에서 경쟁하면서 우승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두세 번 챔피언 조로 쳐봤는데 이번 아니면 또 몇 달,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에 여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또 우승을 놓치면 그럴 줄 알았다는 얘기만 들을 것 같고…. 이제 ‘이번이 아니어도 이미 우승했으니까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왠지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결에게는 우승해서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는 데뷔 때부터 매년 상금의 10%를 고향 순천의 장애인단체 등에 기부하고 있다. 올 시즌은 거의 4억원을 벌었다. 데뷔 후 가장 많은 금액이다. 박결은 “상금이 좀 늘어나면서 더 많은 분들을 도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5년 전쯤인가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했는데 양수진 선배님이 프로 대회 우승 상금의 일부를 그 대회에 내놓으시는 것을 봤어요. 그때 느낀 게 많아 저도 어려운 분들과 후배들 지원에 작게나마 관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결은 “그동안은 마음에 여유가 없어 표정도 경직되고 저를 좋아해주시는 팬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해 죄송스러웠다”며 “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실력과 인성을 갖춘 선수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진=권욱기자
She is...△1996년 전남 순천 △동일전자정보고, 세종대 △2010년 US걸스주니어 아마추어 챔피언십 3위 △2013년 광주시협회장배 춘계학생선수권 고등부 우승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은메달 △2014년 KLPGA 정규투어 시드순위전 1위 △2015년 NH투자증권 챔피언십,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2위 △2016년 용평리조트 오픈 2위 △2017년 삼천리 투게더 오픈, 효성 챔피언십 2위 △2018년 SK네트웍스·서울경제 레이디스 클래식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