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이 뜨거워지고 있다. 기후와 군사적 대립 두 가지 측면에서다. 각국의 쇄빙선 건조 경쟁을 넘어 본격적인 쇄빙 전투함 시대가 시작됐다. ‘북극전쟁’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인류의 마지막 전쟁, 아마겟돈 전쟁은 북극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다. 전쟁에 대한 우려에도 각국의 북극 레이스는 감속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석유와 가스를 비롯해 대규모 매장된 각종 광물자원을 먼저 확보하려는 다툼이 쉽게 조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맥주 파동과 나토 훈련=지난 10월 말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맥주가 동났다. 맥주뿐만이 아니라 위스키처럼 도수 높은 술도 바닥났다. 합동훈련으로 미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합동훈련이란 미국과 영국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29개 회원국과 중립국인 핀란드·스웨덴이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2주일 동안 북극 인근과 북유럽에서 치른 ‘트라이던트 정처(Trident Juncture) 2018’ 훈련. 노르웨이의 북극 인근 해역에 가상 적국의 병력이 상륙했다는 시나리오 아래 진행됐다.
아이슬란드의 주류 파동은 핀란드에서 맥주 등이 긴급 공수되면서 바로 진화됐지만 나토군 훈련은 설전으로 이어졌다. 나토가 설정한 ‘가상 적국’은 누가 봐도 러시아. 자신들을 향한 나토군의 연습에 러시아는 반발했다. 무엇보다 규모가 컸다. 미 해군 해리트루먼항공모함 전단을 비롯해 각국 함정 65척, 항공기 250대, 전투차량 1만대, 병력 5만명이 참가한 이번 훈련은 냉전 종식(1990년대 초반) 이후 최대 규모로 펼쳐졌다. 노르웨이는 ‘훈련 장소가 러시아 국경과 거리가 멀다’며 ‘러시아는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달랬으나 러시아는 국방부·외교부 장관이 나서 ‘북극 지역에서 무모한 무력시위를 펼치는 나토에 맞대응할 것’이라고 맞섰다.
◇러시아, 북극 지역 군비 경쟁 촉발=논쟁의 밑을 파고 들어가면 군사적 긴장과 대립의 원인 제공은 러시아 측의 책임이 더 커 보인다. 러시아는 최근 북극 지역에서의 군사 투자를 크게 늘려왔다. 2015년 북극사령부를 창설한 이래 활주로 14개와 15개 군항, 40개 쇄빙선을 확보하고 4개 특수부대를 편성했다. 올해 말까지 군사기지만 6개를 추가 건설하고 각 군의 역할을 한데 묶는 북극통합전략사령부 창설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오는 2020년 말까지는 북극 지역에 군용비행장 13개, 레이더기지 10개, 수색·구조센터 10여곳이 건설되고 최첨단 방공 시스템도 깔린다.
미국과 서구는 러시아가 북극을 독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영국의 개빈 윌리엄스 국방장관은 지난달 말 “러시아의 잠수함 활동이 냉전 시대에 근접했다”며 “영국은 해병대와 특수부대 800명을 노르웨이 북극 지역에 20~30년간 주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북극 인근의 영토가 많은 캐나다는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여 쇄빙선에 전투장비를 추가한 함정들을 건조하고 있다. 미국도 미사일을 장착한 대형 극지 전투 쇄빙선 모형을 제작해 수로시험 중이다.
◇러…경제 주권 수호 위해 무력 강화=러시아도 할 말이 많다. 러시아가 국가적 사업으로 유전이나 가스전 개발에 나설 때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의 경제제재로 난관에 봉착했던 경험들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최후의 미개발지로 남아 있는 북극에서의 경제 주권을 수호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특히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접근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북극의 광물자원이 주목받게 되며 러시아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조사에 따르면 미개발 자원 중 북극에 매장된 천연가스는 30%, 액화천연가스는 20%, 원유는 13%에 이른다. 빙하가 녹으면 연중 내내 북극 항로에 쇄빙선 없이 배가 다닐 수도 있다. 얼음 바다에 닫혔던 북극 항로는 2017년 대형 화물선이 쇄빙선의 도움 없이 처음 통과하면서 주목받았으나 아직은 하절기 4개월간만 항행이 가능하다. 북극 항로는 유럽과 아시아 무역에서 기존 항로보다 운임·시간 등 물류비용을 30~40% 아낄 수 있다.
북극의 빙하가 거의 사라져 1년 내내 자유항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는 2030년부터는 선박 통행세도 받을 수 있다는 게 러시아와 노르웨이·캐나다·덴마크 등 북극 인접국들의 계산이다. 북극에 대한 관할권은 영토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남극과 연안 8개국으로 구성된 북극이사회가 절대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13개 영구 옵서버국(한국·중국 포함)이 제한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수준이다. 본격적인 영토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최대한 기득권을 인정받겠다는 것이 무력시위와 쇄빙선 건조 경쟁 등의 배경이다.
◇쇄빙선 건조 경쟁 속 ‘中, 핵쇄빙선 확보’ 관심=일본의 군사전문 잡지인 ‘군사연구’ 최근호(11월호)에 따르면 러시아는 46척의 쇄빙선을 보유해 전 세계 쇄빙선의 절반을 갖고 있다. 수량도 그렇지만 러시아 쇄빙선은 규모가 커 쇄빙 능력만 따지면 나머지 모두가 달라붙어도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원자력 추진 동력 핵쇄빙선 8척은 모두 러시아 소유다. 뒤늦게 북극에 눈을 돌린 중국은 러시아에서 원자력 추진 쇄빙선을 도입할 기세다(서방진영은 이 배에 탑재되는 원자로가 궁극적으로 중국의 항공모함에 전용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서방진영은 러시아와의 ‘쇄빙선 갭(gap)’을 극복하기 위해 신규 건조에 나서고 있으나 실행은 쉽지 않은 형편이다. 예산 확보도 어렵지만 쇄빙선 건조에는 몇 가지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두터운 얼음을 깰 수 있는 강력한 엔진과 부서진 얼음을 누를 수 있는 튼튼하고 무거운 뱃머리, 무게중심 이동 등의 기술이 필요한데 몇몇 국가만 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쇄빙 전투함까지 등장=주목할 대목은 민간 용도로 쓰이고 민간이 보유하던 쇄빙선을 이제 군이 직접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중형 쇄빙선 일리야무로메츠(6,000톤)를 해군에 배속시킨 데 이어 본격적인 쇄빙 전투함 건조에 이미 들어갔다. 길이 114m에 배수량 8,500톤급으로 이르면 내후년에 진수될 이반파파닌함은 76.2㎜ 혹은 100㎜ 함포 1문에 각종 기관총, 컨테이너에 수납되는 초음속 대함·대지미사일 8기, 함재용 헬리콥터를 탑재할 예정이다. 기껏 기관포 정도로 무장했던 이전과 달리 전투 전용 쇄빙함이 등장함에 따라 경쟁도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HPIB(Heavy Polar Ice Breaker)라는 이름의 대형 쇄빙선에 대한 수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미국은 토마호크 또는 하푼 미사일을 이 함정에 탑재하는 방안도 강구하고 있다. 미국은 북극 함대 창설도 검토하고 있다. 캐나다도 부분적인 전투 기능을 갖는 해군 소속의 쇄빙 전투함 6척을 건조 중이다. 이전에 노르웨이나 덴마크에서 이런 개념의 함정이 운용된 적은 있으나 본격적인 쇄빙 전투함이 등장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도 북극 항로에 이익 달려=우리도 관련이 있다. 수출입 물류 수송과 러시아산 가스를 들여오는 데 북극 항로가 필요하다. 에너지 차원에서는 러시아와 가까운 구조다. 반면 러시아 대 비러시아의 군사적 대치 구도가 형성되면 한미동맹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점차 관련도가 높아져가는 가운데 해군은 최근 작전반경을 ‘오호츠크해역’까지 넓혔다. 일단 통상로 보호 차원으로 해석되나 눈여겨볼 대목이다. 최근 제주 관함식에서 1호 쇄빙선인 아라온이 사열 함대에 끼었다는 점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아라온보다 훨씬 큰 1만2,000톤급 쇄빙선 건조를 계획했으나 최근 예산당국의 타당성 조사에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500년 이전부터 시작된 북극 항로 개척=북극 항로는 지구온난화의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지만 실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원양 탐험의 선두 주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막힌 유럽의 후발 주자들이 이 항로를 찾으려 애썼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의 중재로 마련된 토르데시야스조약(1494년·지구의 바다를 둘로 갈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과점시킨다는 협정)을 들어 원양 항해에 나서려는 다른 나라들의 배를 보면 잔인하게 부쉈다. 후발 주자인 영국과 프랑스·네덜란드 등이 여기에 불만을 품고 북극 항로 개척에 적극 나섰다.
프랑스 자크 카르티에는 1534년부터 6년 동안 무수한 인명 피해 속에서도 세 차례나 국가 지원으로 탐험에 매달렸다. 카르티에는 북극 항로를 못 찾았으나 그의 탐험은 유럽인이 지배하는 캐나다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네덜란드 빌럼 바렌츠는 북극을 동쪽으로 통과하는 북동 항로를 개척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바다에 이름을 남겼다. 북극 동쪽 바다의 이름 바렌츠해가 바로 바렌츠 선장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이다. 북극 서쪽을 통과하는 북서 항로를 찾던 영국인 선장 헨리 허드슨이 남쪽으로 떠내려와 발견한 ‘중국으로 이어질 것 같은 큰 수로’가 허드슨만이다. 미국 서북부와 캐나다의 시발점이 북극 항로 개척과 연관이 많아서인지 두 나라는 북극의 군사력 투자에 가장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