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물경제의 거울인 금융시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경제활력 저하로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면서 대출처를 잃은 은행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채권에 투자하는 등 돈이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금융권을 맴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서 실물경제의 윤활유라는 돈의 역할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넘치는 유보금…시설자금 대출 증가율 급격히 둔화=5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을 보면 올해 3·4분기 말 제조업의 시설자금용 대출 잔액 규모는 상반기 말보다 1조3,771억원(1.0%) 증가한 134조7,853억원을 기록했다. 대출이 소폭 늘었지만 계절성을 고려해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을 따져보면 4.1%로 지난 2008년 해당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낮았다. 또 지난해 3·4분기 5.4%, 4·4분기 6.1%, 올해 1·4분기 6.4%로 서서히 오르던 증가 폭은 2·4분기(5.0%)에 이어 2분기 연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불투명한 미래에 투자 심리가 악화하며 은행을 찾는 발길이 뚝 끊긴 셈이다.
대출 수요가 줄어든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자체 유보금을 잔뜩 쌓아둔 영향도 있다. 재벌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가 30대그룹 268개사 개별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말 기준 사내 유보금은 882조9,051억원으로 1년 전보다 75조6,013억원 늘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산업 부진이 이어지고 가계 역시 소득과 고용 위축을 체감하는 상황”이라며 “대기업은 반도체 외에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중소기업은 투자 자체가 힘든데 기준금리까지 올라 더 위축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잠자는 뭉칫돈…은행은 결국 채권 투자=돈의 흐름에서 ‘투자’라는 출구가 사라지며 은행 등 금융기관에 들어온 뭉칫돈은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3·4분기 예금은행 총수신 잔액은 1,755조원으로 지난해 말 대비 3.8% 증가했다. 2017년 3·4분기(4.3%)보다 증가율은 다소 떨어졌는데 문제는 한 번 은행에 들어온 돈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 3·4분기 중 예금은행의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18.2%로 1986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돈의 흐름이 꽉 막힌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수신은 늘어도 대출이 시원치 않다 보니 채권 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유통시장에서 은행의 채권 순매수액은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131조3,013억원으로 지난해 한 해 순매수 규모(105조1,520억원)를 훨씬 웃돌고 있다. 은행의 채권 순매수액이 2015년 54조3,000억원, 2016년 49조6,000억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올해 얼마나 채권 매입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다. 금투협의 한 관계자는 “순매수규모 안에는 만기가 도래한 채권도 포함돼 실제 잔액과 차이는 나지만 은행의 채권 수요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돈이 돌지 않다 보니 한은 통화정책도 효력이 약해진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기준금리를 올려도 시장 내 채권 수요가 풍부해 채권금리가 따라 올라가지 않는 모습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순자산 증가세 꺾인 가계, 소비 더 줄이나=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올 3·4분기 가계 순자산은 가처분소득 대비 4.78배를 기록했다. 금융위기 이후 정점을 기록했던 전 분기(4.83배)보다 하락했다.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가계자산이 정체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가계는 자산 증가가 둔화하면 돈을 쓰기보다 저축하는 성향을 보인다. 특히 가계 자산 중 부동산 등 비금융 부문 비중이 74.4%에 달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상승세가 꺾일 조짐을 보이며 이런 현상을 부추길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한은이 지난달 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린 만큼 이자 부담의 증가도 가계 소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 같은 ‘돈맥경화’가 오래가면 경제 활력은 자꾸만 떨어지며 저성장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업이 투자에 나서고 가계는 지갑을 열게 할 정책 수단이 필요한 이유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의 기 살리기와 규제 완화, 투자 촉진이 시급하다”며 “더 나빠지기 전에 조치에 나서지 않으면 내년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능현·임진혁기자 liber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