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사랑해주시는 만큼 제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주세요.”
박항서(59)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은 지난 15일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 기자회견에서 팀 구성원들과 베트남 국민에게 감사를 전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축구 지도자라는 조그마한 역할이 조국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우호 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영광스럽다. 대한민국 국민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지난 15일 밤은 베트남에는 축제의 밤, 한국에는 흐뭇한 미소의 밤이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은 이날 하노이 미딘국립경기장에서 끝난 말레이시아와의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1대0으로 이겼다. 베트남은 1·2차전 합계 3대2로 10년 만에 이 대회 트로피를 들었다. 16경기 연속 A매치 무패(9승7무) 신기록도 작성했다. 우승상금은 30만달러(약 3억4,000만원).
지난해 10월 부임 후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챔피언십 준우승,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등 기록 행진을 계속해온 박 감독은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는 스즈키컵에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면서 화룡점정을 이뤘다.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한국 축구의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도왔던 박 감독은 국내 2부리그와 내셔널리그 우승에 이어 지도자 경력에 또 하나의 ‘별’을 새겼다. 선수들로부터 헹가래 축하를 받았고 베트남 권력서열 2위인 응우옌 쑤언 푹 총리와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축구연맹과 가전업체 아산조, 자동차업체 타코 등으로부터 4강과 우승에 따른 보너스로만 10만달러(약 1억1,300만원) 이상을 챙기게 됐다. 2019년 10월에 계약이 만료되는 박 감독의 보수는 한 달에 2만2,000달러(약 2,490만원)로 알려졌다. 16일에는 정장 차림으로 각종 행사에 참석하느라 더 바쁜 하루를 보낸 그는 베트남 소외 계층과 축구 발전을 위한 기부금 쾌척(10만달러)을 약속해 다시 한 번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다.
현지 매체인 VN익스프레스는 “온 나라가 ‘베트남 보딕(우승)’을 외치며 기뻐 날뛰고 서로 끌어안았다”고 우승 뒤풀이 분위기를 전했다.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와 각종 응원 도구를 든 국민과 오토바이 행렬은 밤새 거리 축제를 즐겼다. 한국 내 중계를 맡은 SBS와 SBS스포츠도 시청률 ‘초대박’을 터뜨렸다. 결승 2차전은 SBS 18.1%, SBS스포츠 3.8%를 더해 21.9%의 시청률(닐슨코리아 조사)로 주말 황금 시간대 프로그램을 모두 제쳤다.
베트남 국민은 미딘 경기장과 거리 곳곳에서 베트남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같은 한국 열풍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박항서 효과’로 순풍을 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박 감독을 광고 모델로 기용한 삼성전자(TV)의 특수가 기대된다. 베트남 내 500대 기업 중 1위로 평가받는 삼성전자는 국내에 유통되는 TV의 대부분을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연간 스마트폰 생산량은 1억5,000만대에 이른다. 자사 스마트폰 연간 판매량의 절반을 베트남에서 조달한다.
이외에도 LG전자는 하이퐁 법인을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며 한화는 이달 초 하노이 인근에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항공기 엔진부품 신공장 준공식을 진행했다. 지난 3월부터 박 감독을 홍보 모델로 내세우고 있는 신한베트남은행은 올해 상반기 당기순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57.9% 증가했다. 또 지난 6월 현지 판매를 시작한 박카스(동아제약)도 박 감독을 모델로 쓴 데 힘입어 석 달 만에 280만개가 팔렸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약 6,000개. 직접 고용만 18만명에 이른다. 1990년 이후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박항서 효과가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을 기업들이 닦아놓았다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박항서 신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년 1월5일 아랍에미리트(UEA)에서 개막하는 AFC 아시안컵이 기다리고 있다. 동남아를 넘어 아시아 최강자를 가리는 ‘아시아의 월드컵’이다. 베트남은 12년 만에 24개국이 겨루는 이 대회 본선에 올랐다. 남베트남 시절이던 1956년과 1960년에 2회 연속 4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이후로는 공동 개최국이던 2007년의 8강이 최고 성적이다. 이번에는 이란, 이라크, 예멘과 같은 D조에 속해 16강도 쉽지 않다. 당장 이란, 이라크는 우승 후보다. 조 3위를 지킨 뒤 각 조 3위 상위 4팀에 주는 티켓을 노려봐야 한다. 하지만 국제대회에서 일으킨 잇따른 돌풍으로 자신감을 얻은 만큼 더 큰 돌풍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내년 3월26일에는 2017 동아시안컵 우승팀인 한국과 ‘2019 AFF-EAFF(동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 트로피’라는 이름으로 하노이에서 A매치 단판 대결을 펼친다. 23세 이하 대표팀 간 대결이었던 지난 8월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는 한국이 3대1로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