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어느 추운 겨울 가수 김광석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 속에서 김광석은 고민 한 줌 없는 소년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밝은 미소에 가려진 어떤 고통과 한숨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일까. 김광석을 잃은 안타까움에 슬피 운 많은 이들은 애써 아픔을 감춘 사진을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졌다.
당시 연출 데뷔를 준비하던 영화감독 지망생 허진호는 우연히 TV를 통해 접한 김광석의 영정사진에서 머릿속 전구가 반짝 켜지는 듯한 영감을 받았다. 사진사인 한 남자가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다면. 그 남자의 마지막 나날들에 사랑이 찾아든다면.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손으로 영정사진을 찍는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김광석의 죽음 이후 2년이 흐른 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불치병’처럼 뻔한 소재를 갖고도 눈물 쥐어짜는 멜로 드라마의 낡은 공식과 결별한 이 작품은 개봉 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국영화의 클래식’이 됐다.
전북 군산에 가면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를 만날 수 있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군산에서 촬영이 이뤄졌는데 핵심 장소로 등장하는 ‘초원 사진관’은 근대문화 역사 거리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군산시는 영화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원래 촬영 세트장이었던 이 공간을 여행객이 다녀갈 수 있는 전시관으로 새롭게 꾸몄다. 영화에서 구청 소속의 주차 단속원으로 나오는 다림(심은하)은 사진 현상을 위해 이곳을 드나들면서 정원(한석규)과 인연을 맺는다. 다림은 천성이 선한 정원에게 끌리고 정원도 밝고 씩씩한 다림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은 정원은 애써 사랑을 숨기고 일부러 감정을 외면한다. 끝내 정원은 자신의 처지를 알리지 않은 채 병원에 실려가고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다림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사진관에 애꿎은 편지만 구겨 넣는다. 두 사람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싹 틔운 초원 사진관으로 들어가면 작품 속 장면을 담은 액자들과 앨범·선풍기·카메라 등의 소품들이 보인다. ‘초원’이라는 이름은 주연 배우인 한석규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있던 사진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가 품은 아련한 감성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곳은 주말이면 1,000명 가까운 여행객이 찾는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별도의 입장료는 없으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동절기(11~2월)에는 오후5시까지, 하절기(3~10월)에는 오후6시까지 운영하며 개장 시간은 오전9시로 동일하다.
작품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군산서초등학교’는 초원 사진관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영화에서 딱 하루 ‘사진관 밖 데이트’를 하는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 이어 찾은 곳이 바로 이 학교의 운동장이다. 정원의 모교로 설정된 이곳에서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듯 심장이 터져라 달린다. 다림은 애교 섞인 말투로 “빨리 뛰어요”라고 타박하는데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흘러가 버린 세월을 말해주듯 학교 건물의 외벽은 완전히 달라졌고 영화에선 보이지 않았던 바람개비가 운동장 곳곳에서 무심히 돌아가고 있다. 대신 이곳이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둥그런 비석이 방문객을 맞이하며 그때 그 순간을 추억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초원 사진관이다. 두 사람은 햇빛을 피할 나무그늘이 간절한 한여름에 처음 만났는데 어느덧 계절은 흰 눈 소복한 겨울로 바뀌었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관객들이 ‘크리스마스 언저리가 아닐까’ 짐작하는 찰나, 검정 코트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다림이 나타난다. 그리고 다림은 사진관 앞에 걸린 자신의 사진을 본다. 막 사랑을 키워가던 무렵 정원이 찍어준 사진 속에서 다림은 하얀 머리띠를 하고 새초롬하게 웃고 있다. 다림은 정원이 병에 걸린 것도, 세상을 떠난 것도 알지 못했지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남긴 아름다운 기억만 가슴에 품은 듯 빙긋이 미소 짓고 돌아선다. 그때 화면 위로 정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아마도 이제는 이곳에 없는 정원이 하늘나라에서 보낸 편지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글·사진(군산)=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