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예술과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장벽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 장벽의 문턱은 꽤 높아서 ‘통섭’과 ‘융합’이 시대의 화두로 부상한 오늘에도 성격이 다른 두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예술가는 흔치 않다. 성악을 전공한 김순영(38·사진)도 몇 년 전까지는 고급예술의 우아하고 고상한 울타리 안에서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소프라노였다. 겉으로는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적 완성도와 개성”이라고 말해도 속으로는 대중문화를 살짝 낮춰 보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오페라나 정통 클래식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해 별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 김순영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우연히 지인과 함께 본 뮤지컬 ‘레베카’였다. “벌써 5~6년 가까이 지났는데 그때 받은 충격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나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새 없이 손에 땀을 쥐고 감상하는데 배우들의 연기와 화려한 무대장치, 격정적인 선율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어요.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내 생각은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죠.”
최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자택 인근 카페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김순영은 “편견이 그렇게 깨지고 나니 거짓말처럼 기회가 찾아왔다”며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과거를 돌아봤다. “‘레베카’를 보고 6개월쯤 흘렀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제작사에서 뮤지컬 ‘팬텀’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어요. 속으로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고민 없이 ‘바로 하겠다’고 답했죠.”
대범한 양 제안을 수락했지만 난생처음 도전하는 뮤지컬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려운 장르였다. 발성과 대사 표현, 연기 톤 등 가장 기본적인 요소부터 오페라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첫 공연을 앞두고 석 달 정도 매일 10시간씩 연습했어요. 기를 쓰고 열심히 하는데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지는 한참 멀리 있는 것만 같아서 밤마다 잠을 설쳤어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고 실제로 기획사에 ‘나 뮤지컬 못하겠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랬더니 회사에서는 ‘무대에 오르면 다 보상을 받을 텐데 조금만 참자’고 하더군요. 그야말로 이 악물고 버텼죠.”
고통 끝에 찾아오는 달콤한 열매처럼 지난 2015년 첫선을 보인 뮤지컬 ‘팬텀’은 김순영에게 감동적인 선물을 가득 안겨줬다. 프랑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 원작인 이 작품은 연일 매진 행렬을 기록했고 김순영에 대해서는 “오페라 스타가 농익은 연기와 노래로 뮤지컬 무대를 장악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관객이 뽑은 2015년 최고의 여우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첫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쳐주는데 어찌나 감사한지 가슴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기분이었죠. 보통 오페라는 한 작품당 4회 정도 무대에 올리면 끝인데 3개월 동안 100회 이상 펼쳐지는 공연에서 제가 담당하는 횟수만 30번이 넘으니 관객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쁨도 더 오래 이어지더라고요. (웃음)”
새로운 장르에 멋지게 안착한 김순영은 2016년 ‘팬텀’ 재연, 2018년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다시 ‘팬텀’으로 관객들과 세 번째 만나는 중이다. 다음달 17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볼 수 있는 이번 공연에서도 김순영은 초·재연 때와 마찬가지로 극의 여주인공인 크리스틴 다에 역할을 맡는다. 뮤지컬 분야의 슈퍼스타인 정성화, 카이 등과 함께 무대를 꾸민다. “제가 연기하는 크리스틴은 천사처럼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에요. 소녀 같은 발랄함이 매력이지만 엄마처럼 다른 사람을 품는 성숙함도 갖췄죠. 시골 출신 특유의 순수함도 있고요. 극 중의 오페라 극장장인 마담 카를로타가 ‘넌 시골에서 왔니?’라고 묻자 크리스틴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네!’ 하고 씩씩하게 답하는 대목이 있어요. 어릴 적 주변이 논밭으로 가득한 대전의 한 변두리 마을에서 살았던 경험 덕분인지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이 부분이 특히나 가슴 깊이 와 닿았어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즐겁게 이어가던 김순영에게 명장면을 하나만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한참을 고민한 그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는 2막의 뒷부분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작품의 주인공인 팬텀은 흉한 얼굴을 가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데 그를 깊이 사랑하는 크리스틴이 어느 날 큰맘 먹고 ‘가면을 벗어달라’고 얘기하죠. 그러면서 나오는 노래가 ‘마이 트루 러브(My true love)’인데 선율도 아름답고 가사도 기가 막혀요. 팬텀은 ‘당신 어머니도 당신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잖아요. 그게 사랑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요’라는 크리스틴의 말을 듣고 마침내 가면을 벗어요.”
뮤지컬에 재미를 붙이고 부지런히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김순영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뿌리인 오페라 활동을 게을리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동아 음악콩쿠르(2005년), 스위스 제네바콩쿠르(2009년) 입상 등을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의 ‘유쾌한 미망인’ ‘세빌리아이발사’ ‘라보엠’ ‘사랑의 묘약’ 등 수많은 작품의 주역으로 활약한 그에게 오페라는 여전히 가장 친숙한 예술 장르이자 더 높이 오르고 싶은 ‘큰 산’이다. 당장 김순영은 오는 3월28~31일 공연되는 ‘마술피리’에 파미나 역으로 출연한다. 국립오페라단의 올해 첫 번째 라인업인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두 남녀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뮤지컬에 처음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앞으로 오페라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런데 저는 ‘팬텀’의 성공 이후 오히려 더 많은 오페라 작품 제안을 받았어요.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죠.”
김순영은 또 지난해 창단한 ‘더 디바스’의 이름으로도 가능한 한 자주 관객들과 만나려고 한다. ‘더 디바스’는 김순영을 비롯해 강혜정·한경미·김수연 등이 의기투합한 성악 그룹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쉽지 않은 ‘소프라노 4인의 중창단’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모두 바쁜 분들인데 이렇게 하나의 그룹으로 모인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만날 때마다 기쁘고 함께 연습할 때마다 큰 의지가 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열심히 무대를 꾸며서 ‘한국판 일 디보(Il Divo·영국의 팝페라 그룹)’가 나왔다는 평가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김순영은 오늘도 가슴에 품은 여러 가지 꿈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고 있다. “지난해 공연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패티 역할을 맡았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엘리자벳이라는 캐릭터도 꼭 연기해보고 싶어요. 물론 그 전에 정말 많은 훈련과 경험을 해야겠죠.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정통 오페라와 일반 대중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오페라와 뮤지컬의 서로 다른 장점과 매력을 접목한 작품을 직접 연출해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처럼 오페라와 뮤지컬을 꾸준히 넘나들면서 어디서나 인정받고 사랑받는 소프라노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요.” 사진=권욱기자
◇She is…
△1980년 대전 △2006년 한양대 성악과 △2010년 독일 만하임국립음대 석사 △2004년 제13회 성정 전국음악콩쿠르 최우수상 △2009년 제64회 스위스 제네바국제콩쿠르 입상 △2013년 제6회 대한민국오페라대상 특별상 △오페라 ‘라보엠’ ‘사랑의 묘약’ ‘카르멘’ 등 다수 공연 △뮤지컬 ‘팬텀’ ‘안나 카레니나’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