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에 자리한 국내 4대 갈대밭 중 하나
산책로 뒤편엔 찰랑이는 금강의 은빛 물결도
‘신성리 갈대밭’을 찾은 여행객들이 환한 햇살 아래 사진을 찍고 있다. 박찬욱은 법과 제도가 허락하지 않는 사회의 금기(禁忌)에 꽂힌 예술가다. 그리스 신화의 분위기를 빌린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을,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한 ‘아가씨’는 조선인 하녀와 일본 귀족 여성의 동성애를 다룬다. 박찬욱의 세 번째 작품이자 출세작인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도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가뿐하게 금기를 넘나들며 세상의 관습과 통념을 뒤흔든다. 남북한 군인의 우정과 연대를 다룬 이 영화는 개봉 후 18년이 넘게 흐른 지금 봐도 도발적인 설정과 도전적인 용기로 가득하다.
충남 서천군에 자리한 ‘신성리 갈대밭’으로 가면 ‘JSA’의 촬영지를 만날 수 있다. 바람에 넘실대는 황금빛 장관이 일품인 이곳은 대한민국의 ‘4대 갈대밭’ 중 하나로 꼽히는 관광명소다. 입구부터 ‘JSA’의 포스터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안내판이 보이고 몇 걸음 옮기면 여행객을 위한 산책로가 나온다. 약 20만㎡ 대지에 일부만 산책로로 조성하고 나머지는 생태보존구역으로 관리하고 있지만 푸른 하늘과 갈대, 시리도록 맑은 금강이 어우러진 풍경은 잊기 힘든 감흥을 선물한다. 데이트 코스로도 좋고 혼자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JSA’의 스틸컷 남한의 이수혁 상병(이병헌)은 이 갈대밭에서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와 정우진 전사(신하균)와 처음 인연을 맺는다. 비무장지대 수색 도중 소변을 보기 위해 잠시 대열을 이탈한 이수혁이 실수로 지뢰를 밟는데 우연히 그 모습은 오경필과 정우진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적군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고 지뢰를 제거해준다. 이렇게 두 사람과 안면을 튼 이수혁은 병장으로 진급한 뒤 부하인 남성식 일병(김태우)까지 끌어들여 새벽이면 북한군 초소로 몰래 넘어가 과자도 나눠 먹고 술 한잔도 걸치며 체제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눈다.
‘신성리 갈대밭’에 놀러온 방문객들이 이곳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간판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요 공간인 판문점이 나오는 장면은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세트를 만들어 찍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는 세밀한 고증으로 실제와 똑같이 구현한 판문각과 팔각정·회담장 세트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다만 이곳은 지난해 6월부터 20명 이상의 단체관광객이 사전 신청을 한 경우에만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세트 곳곳을 거닐다 보면 ‘그림자놀이’를 하며 천연덕스럽게 장난치던 이병헌의 연기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군사분계선 너머의 이병헌에게 침을 뱉으며 아이처럼 웃던 신하균의 환한 미소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처럼 배꼽 잡는 유머를 담은 장면들이 여럿 생각나지만 사실 ‘JSA’는 처음부터 비극의 숙명을 안고 태어난 작품이다. 마치 힘을 줘도 잘 오므려지지 않는 악력기처럼, 순진한 우정만으로 버티기에는 서로 다른 체제가 벌려놓은 틈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이수혁의 제대를 앞두고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다시 모인 네 사람은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비극과 마주한다.
경기도의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마련된 팔각정에서 내려다본 판문점 세트. 이 장대한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영화 초반 판문점을 둘러보던 한 외국인 관광객이 찍은 흑백사진이다. 얼굴을 트기 전의 네 사람은 저녁 어스름처럼 소리 없이 밀려오는 불행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한 채 보초를 서고 있다. 카메라는 헤엄치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사진 속의 네 사람을 한 명씩 비추는데, 다시는 이들이 함께할 수 없음을 아는 관객의 심장은 슬픔으로 요동친다. 영화의 깊은 여운이 한창 극장가를 휘감던 무렵 박찬욱은 한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남북이 다시 하나로 뭉쳐서 사람들이 코미디 영화를 볼 때처럼 웃으며 ‘JSA’를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저런 말도 안 되는 시절이 있었구나, 혀를 끌끌 차면서요.” 그로부터 18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날은 오지 않았다. /글·사진(서천·남양주)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JSA’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흑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