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부산에서 다방 여종업원을 납치해 강도 살해한 혐의를 받은 40대 남성에 대해 대법원이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건 발생 이후 15년 만에 붙잡혀 하급심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지만 직접 증거가 없어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양모(48)씨의 상고심에서 “제3자가 진범일 가능성이 있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양씨(당시 31세)는 2002년 5월 부산 괘법동 한 다방의 여종업원 A씨(당시 22세)를 납치해 청테이프로 손발을 묶고 흉기로 가슴 등을 수십 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았다. 사체는 마대자루에 담긴 채로 부산 강서구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그는 범행 다음 날 낮 12시15분께 부산 사상구의 한 은행 인출기에서 A씨 통장에 든 예금 296만원을 출금하고 같은 해 6월 알고 지내던 주점 여종업원 2명을 시켜 부산 북구의 한 은행에서 A씨 적금 500만 원을 해지해 챙긴 혐의도 받았다.
경찰은 수사 초기 A씨의 지인 이모씨를 유력 용의자로 봤다. 이씨는 특수강도 전력이 있는 데다 당시 A씨와 통화하고 만난 사실을 감추고 허위 진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씨가 예금을 인출하는 CCTV 영상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다만 양씨가 모자를 쓰고 있던 데다 화질도 흐려 용의자가 특정되지 않은 채 사건은 미제로 남는 듯했다.
이후 이른바 ‘태완이법’으로 2015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되면서 양씨는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이 지난 2017년 경찰 장기미제전담팀에 검거됐다. 양씨는 2004년 여성들을 흉기로 위협해 청테이프로 묶고 강간하려 한 혐의 등으로 총 10년6개월을 복역한 뒤 출소한 뒤였다.
양씨의 살해 혐의에 대한 증거는 CCTV 영상, “물컹한 내용물이 담긴 마대자루를 함께 옮겼다”는 동거녀 진술, 청테이프를 사용한 범죄 수법 등 대부분 간접 증거였다. 시신에서 나온 DNA나 지문, 목격자 등 직접 증거가 없었다. 양씨는 “A씨의 핸드백을 주워 비밀번호를 조합해 돈만 인출했을 뿐 살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1·2심은 “유사 범행 이력, ‘살인 공소시효’ 등을 휴대폰으로 검색한 점, 차량에서 혈흔이 발견된 점 등 여러 사정 등으로 미뤄 강도살인 혐의가 충분히 인정된다”며 양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간접증거만으로 범행이 증명됐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여러 의심스러운 사항을 면밀하게 심리한 후 유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며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주문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양씨가 아닌 제3자가 진범이라는 내용의 우편이 대법원에 접수돼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