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외교의 총결산’을 위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강력하게 추진해온 러일 평화조약 체결과 러시아가 실효지배 중인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 귀속 문제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별다른 정치적 성과 없이 러일 경제협력 강화 약속만 남긴 채 끝나자 일각에서는 영토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미일동맹 사이를 파고들며 일본의 투자만을 얻어내려는 푸틴 대통령의 외교술에 아베 총리가 말려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2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러일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평화조약 체결 문제를 놓고 3시간 이상 비공개회담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는 못했다.
푸틴은 회담 뒤 “양국은 평화조약 서명에 대한 관심을 확인했으며 조정자로서 양국 외무장관을 지명했다”면서도 “앞으로 길고 힘든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며 협상 장기화를 예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양국 교역을 수년 안에 지금의 1.5배 수준인 연간 300억달러 수준까지 확대해나가기로 했다”며 양국 간 경제협력을 강조했다.
아베 총리 역시 “우리는 푸틴 대통령과 공동작업을 열성적으로 해나가기로 합의했다”는 원론적 수준의 말만 되풀이한 채 러시아 측을 의식한 듯 기자회견 내내 ‘북방영토’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은 “회담 후 나온 성명 대부분이 액화천연가스 사업 등 경제와 안보 관련 내용”이라며 “이번 협상에서는 아베가 주장한 영토협상 카드보다 러시아의 경제협력 카드만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양국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측에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평가다.
외신들은 이번 협상 결과를 두고 아베의 다급함을 이용한 푸틴의 외교전술이 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제임스 브라운 일본 템플대 교수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 지도자들은 일본과의 영토분쟁을 지속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안다”며 “특히 영토협상을 장기화하면서 일본이 주요 서방국가들과 거리를 두도록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주요7개국(G7) 중 일본의 제재 조치는 ‘가장 약한’ 수준에 그쳤으며 지난해 영국에서 발생한 러시아 스파이 독살 미수사건 때도 G7 중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지 않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