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지선(가명)양은 지난해부터 놀이치료를 받고 있다. 영어유치원을 다닌 뒤 조음장애(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증상)가 찾아와 의사전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뒤 말하기에 자신감이 없어진 지선양은 모든 문장을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듯 얼버무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발음 훈련을 받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자신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선우현 명지대 아동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조기 영어교육을 받은 아이들 가운데 말을 삼키듯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두 언어를 동시에 말하거나 말하기를 꺼리는 습관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 5~7세 아이들이 배우는 영어유치원 교육과정을 보면 안부 묻기, 영어단어 게임 하기, 영어 지문 읽기가 매일 아침 프로그램으로 배정돼 있다.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려면 알파벳을 알 뿐만 아니라 여러 영어단어를 인지하고 간단한 문장까지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를 수업 수준에 맞추기 위해 입학 전 ‘영어유치원 선행학습’까지 시키는 형편이다.
언어담당 뇌기능 형성하기 전부터 교육
스트레스로 조음장애·ADHD 등 초래
실제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 2017년 국내 영어유치원 교재와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미국 독서능력 난이도 지수 ‘렉사일 지수’로 환산해 비교해본 결과 영어유치원 교재 난이도는 420L로 중1 영어 교과서의 평균인 295~381L보다 높았다. 유치원생이 중학생보다 더 어려운 영어를 공부한다는 뜻이다. 미국 유아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교재에 미국 명절이나 풍습을 설명하는 단원이 끼어 있기도 한다.
‘선행학습을 시킨다’며 좋아하는 학부모들이 많지만 소아과 전문의와 학계는 영어유치원 열풍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학습시기가 찾아오지 않은 유아에게 지나친 부담일 뿐만 아니라 들인 비용 대비 학습효과도 크게 떨어져서다.
서유헌 가천대 뇌과학연구원장은 “언어를 담당하는 뇌 기능이 초등학교 2학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전에 두 가지 언어를 강압적으로 노출시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며 “한국어도 완벽하지 않은데 자꾸 다른 언어를 배우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 언어장애나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등 정신질환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일찍 배울수록 흡수가 빠르다’는 속설에 대해서는 “유아교육은 관련 뇌 기능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시켜야 효과가 증폭된다”며 “4~5세 때는 인성과 사회성이 발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에 맞춘 교육을 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방대한 교재는 美 그림책만 읽히는 꼴”
유아 영어실력, 성인까지 이어지지 않아
“4~5세는 인성 발달…시기 맞춰 교육을”
영유아 시기의 영어 실력이 반드시 성인기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어릴 때 영어에 노출되면 좋다는 것은 이민처럼 일상생활이 영어로 채워져 있을 때 얘기”라며 “유치원만 다니는 상태로는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이 어렵다”고 했다. 방대한 교재에 대해서도 “많은 영어유치원이 5~6세용 미국 교재인 ‘파닉스’를 쓰는데 한국 5세는 미국 5세의 단어 구사력을 따라갈 수 없다”며 “마치 미국 유아에게 한국어 그림책을 읽히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지 않다 보니 사각지대도 생긴다. 영어유치원은 유아교육법이 아닌 학원법으로 관리받는 100% 사교육 기관이다. 정부가 교육과정과 강사의 자격, 급식 실태를 전혀 관리하지 않아 곳곳에서 구멍이 발견된다. 서울 강남구의 영어유치원 2곳에서 근무했다는 학원강사 윤모(35)씨는 “일반유치원과 달리 유아기에 배워야 하는 활동과 수업을 체계적으로 짜지 않고 원어민 강사 수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먹구구로 가르치면서 비싼 원비를 받을 때는 죄책감이 들었다”고 전했다.
양신영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연구원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지 않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강사를 쓰거나 유아용 변기가 아예 없는 상가용 화장실을 쓰는 유치원도 많다”며 “학부모들이 유명세만 듣고 아이를 보냈다가 뒤늦게 옮기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실제로 강사 윤씨가 근무한 영어유치원 가운데 한 곳은 상가건물에 입주해 있어 유아용 변기가 한 개뿐이었다. 성인용 변기를 쓰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은 하원 때까지 소변을 참기도 했다.
이처럼 영어유치원은 공교육 기관과 거리가 멀지만 학원 이름에 독일어로 학교를 뜻하는 ‘슐레(schule)’를 넣거나 영어로 ‘스쿨(school)’을 끼워 넣어 버젓이 공교육 행세를 하고 있다. 현행 유아교육법상 공교육에 속한 유치원이 아니면 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우회 전략을 쓰는 셈이다.
교육부는 영어유치원 공식 명칭을 ‘반일제 이상 운영 유아 대상 영어학원’으로 정하고 오는 11월까지 영어유치원 명칭을 사용하거나 교습비를 초과 징수하는 유아 학원에 대해 열 차례 합동점검을 실시할 예정이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영어학원 교육과정 자체를 유아교육법에 근거해 제재할 수는 없지만 학원법에 따라 강사 등록 현황이나 시설 변경 여부를 계속 관리해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