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민주노총이 총파업하면 국민 중 누가 눈 하나 깜짝이라도 합니까. 파업으로 얻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28일 밤 늦게까지 진행된 민주노총 67차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한 대의원은 이렇게 외쳤다. 민주노총은 이날 노사정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불참을 사실상 확정 짓고 다음달부터는 총력투쟁과 총파업 등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 대의원 내부에서는 투쟁에 대한 회의감도 많았다. 경사노위 무조건 불참안(958명 중 331명 찬성), 조건부 불참안(936명 중 362명 찬성)이 모두 부결된 것도 이 같은 회의감의 방증이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 대신 투쟁에 나서면서 노정 관계는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대화 복원을 외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문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1월 말 양대 노총(한국노총·민주노총)과 사용자단체(한국경영자총협회·대한상공회의소), 고용노동부 장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현 경사노위) 위원장 등이 참가하는 노사정 대표자 회의가 꾸려진 지 약 1년 만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만 하더라도 노동계는 수세에 몰렸고 이들의 투쟁은 여론의 일정한 지지를 받았다. 2013년 12월 한국노총은 민주노총 회관에 경찰 병력이 투입된 것에 항의하며 당시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다가 이듬해 8월 복귀했다. 2015년 9월에는 노사정위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 및 사회적 대타협을 체결했지만 정부는 2016년 1월 ‘쉬운 해고’ 양대 지침으로 불리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해석 및 운용 지침’을 강행 처리해 한국노총의 노사정위 탈퇴를 불렀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계가 정책을 주도하는 상황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특히 민주노총은 ‘촛불혁명’을 통한 전 정권 탄핵 축출의 일등공신을 자임하며 각종 친노동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촛불 청구서’다. 노동계의 한 전문가는 “정부는 노동계 요구를 수용하는 가운데 고용쇼크, 주력 산업 부진위기가 닥치자 보완책을 마련했고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이에 반발하며 투쟁을 외치는 게 현재 노사정 관계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 정부는 불완전하게나마 노동계가 요구한 정책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최저임금은 2018년 16.4%, 올해 10.9% 인상해 시간당 8,350원으로 뛰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 맞춘 두자릿수 인상이다. 민주노총이 결사반대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방안도 주 52시간 근로단축 제도 시행에 따른 보완 성격이 강하다. 해고자의 노조원 자격 인정과 공무원의 노조 활동 허용 확대 등을 담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역시 노동계가 먼저 요구한 사안이다.
민주노총 안팎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의 ‘정파 경쟁’이 노총 전체의 투쟁성을 강화한다는 의견도 많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민주노총 산하 노조는 똑같은 사업장이라도 위원장마다 계파가 나뉘어 현행 노조 지도부와 임금 등 단체협약을 맺어도 다른 계파에서 무효를 외치며 투쟁에 나서는 사례가 많다”며 “노무 담당자들은 민주노총 산하 노조와는 애당초 타협을 기대하지 않는 지경”이라고 전했다. 민주노총 내 산업별 노조 중 가장 큰 금속노조는 노사정 대화에서 얻을 게 없다고 보고 경사노위 참여를 반대해왔다. 금속노조가 더불어민주당·정의당 등과의 기존 연대 노선을 멀리하고 급진 좌파 정당인 민중당과의 연대를 선호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더구나 현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이번 대의원 대회에서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어 민주노총의 투쟁 노선이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배수진을 치고 경사노위 참여를 안건으로 냈지만 투쟁 성향 정파를 압도하지 못해 사실상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김 위원장의 불신임을 거론하는 목소리들이 커지는 형국이다.
노동계 전문가들은 정권이 달라져도 주객만 바뀌어 계속되는 노사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국내 노사가 낡은 투쟁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세계 각국은 산업혁명 4.0시대를 맞아 양보를 통한 노사 상생을 추구하고 있다”며 “반면 한국 노사는 아직도 산업혁명 1.0시대의 ‘노동계와 자본의 투쟁’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